늘 푸른 이야기
『늘푸른 이야기』는 작가 이미라를 오늘에 있게 한 출세작이다. 1989년 대본소용으로 처음 출판되었다가, 강산이 한번 바뀌고도 한참은 지난 2002년 시공사에서 재 출간되었다. 세월의 너울 속에 어느덧 중견 작가의 지위에 올라섰지만, 그 세월의 무게가 작가의 작품 속 ...
2002-07-30
김정묵
『늘푸른 이야기』는 작가 이미라를 오늘에 있게 한 출세작이다. 1989년 대본소용으로 처음 출판되었다가, 강산이 한번 바뀌고도 한참은 지난 2002년 시공사에서 재 출간되었다. 세월의 너울 속에 어느덧 중견 작가의 지위에 올라섰지만, 그 세월의 무게가 작가의 작품 속 깊이하고 꼭 비례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이 만화는 슬비와 푸르매, 서지원이 형성하는 삼각 관계 안의 두 커플이 중심이 된다. 곧 슬비와 서지원이 한 축이 되고 슬비와 푸르매가 또 하나의 축을 구성하는데, 궁극적으로 두 커플의 엇갈리는 관계가 이 만화의 핵심 요소가 되는 것이다. 서지원은 어렸을 때 죽은 여동생과 똑같은 모습을 가진 슬비에 대한 호감이 사랑으로 바뀌면서 슬비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반면 푸르매는 슬비와 이란성 쌍둥이로 자라나지만,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 슬비가 친형제가 아닌 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슬비에 대한 연민을 서서히 사랑으로 바꿔나간다. 전반부에서 각각 연인과 형제였던 두 커플의 관계는 죽은 줄 알았던 서지원의 동생 지혜가 바로 슬비인 것으로 밝혀지면서 기묘하게 역전된다. 형제였던 사이가 연인으로, 연인이었던 관계가 형제로 도치되는 것이다. 어느 쪽이나 근친상간이라는 인류의 오랜 금기를 상기시키지만, 그렇다고 인류학적이건 사회학적이건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근친상간을 염두에 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는 이 만화가 근본적으로 바탕을 두고 있는 ‘우연성’의 필연적 결과물로 보아야 마땅하다. 서사를 이끌어 가는 원리가 필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연에 있다 보니 인물간의 관계와 그것이 변화를 갖게 되는 계기가 작위적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우연하게 만나고 쉽게 사랑에 빠지며, 감춰져 있던 진실은 황당하게 밝혀져 버린다. ‘우연을 가장하는 필연’이 이상적인 형태라면 결국 ‘필연을 가장한 우연’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것이 이 만화가 독자의 공감대를 끌어내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이는 결정적 지점이다. 이 만화의 결코 공감적이지 못한 세계는 이미 제목 속에 노정 되어 있다. 전작 『늘푸른 나무』와 마찬가지로 이 만화가 보여주려고 애쓰는 것 역시 ‘늘푸른’ 세상이다. 어둡고 슬픈 상황 속에서도 해맑게 빛나는 슬비의 눈망울은 이 세계가 지향하는 이미지다. 짝사랑했던 남자로부터 거절을 당하더라도, 지금껏 알아왔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뒤바뀌는 정신적 혼란을 겪게 되더라도 걱정하지 마시라. 이 세계에서 낙담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촌스런 까만 옷을 뒤집어쓰고 흑기사로서의 책임감에 불타오르는 ‘흑나비’가 언제 어디에서나 그녀 옆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또 혹시라도 죽을 듯한 고통에 잠시 몸을 맡겼다면 그에 상응하는 아니 그 고통을 잠재우고도 차고 넘칠 만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으니 잃은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을 터이다.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진실한 사랑과 부유하고 능력 있는 후원자를 동시에 얻게되었으니 부와 사랑을 한꺼번에 낚아챘다고나 할까. 하지만 현실이란 늘 푸르기만 할 수는 없기에 너무 푸르기만 한 이 곳은 이미 현실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 푸르기만 한 세상에도 불협화음이 있으니, 바로 군데군데 가벼운 웃음을 유도하는 코믹 장치들이다. 푸른 세상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 본래적 의도였겠으나 문제는 그것들이 코믹함을 유도하려는 의도인 줄은 뻔히 보이는데 불행스럽게도 ‘촌스러움’ 외에는 별다른 감흥을 전해주지 않으니 불협화음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장장 10여 년이라는 시간적인 건너뜀에서 비롯되는 더욱 세련미를 더한 시선 탓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요소는 작품자체에 내재되어 있다. 즉 작품 속의 시공간적 배경과 등장인물이 벌이는 언행의 불일치 속에 이미 ‘촌스러움’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89년도에는 거의 드물다시피 했던 남녀 공학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마치 70년대 ‘얄개시리즈’에서나 볼 법한 말투와 개그를 풀어놓으니 그 부자연스러움은 당연히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 이미라 만화 속의 등장인물들은 이렇게 ‘늘 푸른’ 세상 속에 머물러 있다. 만약 그들이 현실 속에 있는 다른 세상의 사람들과 진정한 만남을 가지길 원한다면 이제 그만 그 경계를 넘어 푸르기도 하고 어둡기도 한 세상이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는 또 하나의 의지로서 거듭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