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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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유엔)

또 다른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엔터테이먼트의 세계에서는 흔히 써먹는 소재의 하나이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과 같은 유명한 해외영화도 있지만, 독일의 민담의 분석에서 처음 사용된 개념인 도플갱어 (Doppleganger=Double Goer)라는 정신분석학 용어가 ...

2002-04-15 이가진
또 다른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엔터테이먼트의 세계에서는 흔히 써먹는 소재의 하나이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과 같은 유명한 해외영화도 있지만, 독일의 민담의 분석에서 처음 사용된 개념인 도플갱어 (Doppleganger=Double Goer)라는 정신분석학 용어가 말하여 주듯이 분신이나 생령. 나 자신의 또 다른 닮은꼴들은 당사자가 아니면 알아 볼 수 없는 꼭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으며 서로가 만나는 게 되면 곧 죽는다는 오컬트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해석이 오컬트적이던 SF적이던 이러한 소재의 내용은 대부분 비극적인 면모를 보여 주었고, 최근에 개봉된 액션 영화인 「더 원」만 보더라도 다른 차원의 내가 또 다른 차원의 자신들을 죽이고 다니는 흉악한 이야기가 아니던가. 하지만, 화약냄새 풍기는 피바다의 액션영화와 꽃배경이 넘치는 삼각관계의 순정만화는 전혀 다른 세계이다. 『UN...』은 오컬트나 액션보다는 일본영화 「러브레터」에 가까운 그런 감각으로 다가온다. 이제는 특이 할 것도 없는 평행우주의 개념을 도입, 나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는 실은 뭔가 좀 더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누구 나가 해봄직한 상상을 종이 위에 옮긴 『UN...』에서는, 또 다른 나 자신들은 공주님과 왕자님이었다는 사실에서 결정적으로 전형적인 순정만화의 냄새를 풍긴다. 명백한 10대 소녀 취향의 미남미녀 캐릭터들이 포진된 『UN...』에서는 비록 스토리 전개상 납치극이니 음모니 하는 흉악한 사건이 벌어질 망정, 또 다른 나 자신에 대한 거부는 전혀 보이지 않을뿐더러 설정에서나마 주인공 남매가 고려의 후예인 왕씨라는 점이 금새 유행을 따라가는 최근의 읽기 쉽고 편안한 10대용 만화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제목을 알기 힘든 약자로 짓는 것이 또한 최근의 10대를 향한 대중문화 전반의 유행인지는 몰라도 ‘YOU AND...’라는 얼핏 무의미해 보이는 문장의 한 조각을 줄인 『UN...』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만화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그 대사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터넷의 보급 이후 소위 ‘통신어’라는 인터넷만을 위한 문체가 네트워크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비밀도 아니게 되었고 그러한 국어파괴의 한 형태로 보이는 문체들이 상당히 교양 없고 천박해 보이는 탓에 소위 ‘외계어’라는 별칭으로 많은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중고등학생, 특히 그 나이 또래의 또래집단만의 비밀을 간직하고 싶어하는 여학생들 사이에서 일종의 은어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는 비율 역시 무시 할 수 없다. (또 그 어감이 귀엽다고 느끼는 그 또래만의 독특한 감각을 생각하면 『UN...』의 귀엽고 귀여운 화풍과도 잘 어울린다.) 덕분에 아직 오락성보다는 공공성을 중시하는 우리 나라의 TV에서 조차 「방가방가 햄토리」라던가 「팅구」같은 저연령을 대상으로한 방송에서 ‘통신어체’의 타이틀을 목격 할 수 있게 된 것 아니겠는가. 『UN...』의 본편속의 “여?”, “염”, 같은 어미를 비롯하여 “하이루”같은 인사말까지, 그러한 10대 독자를 위한 작가의 계산이었음을 쉽게 짐작 할 수 있지만, 아직도 네트워크 안에서만 그 존재를 인정받을 뿐 그 이외의 영역에서는 이단 취급을 면하기 어려운 이러한 언어활동인 탓에 단행본화 되면서는 그러한 대사의 일부분이 ‘바르고 고운 말’로 수정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별 것 아닌 사건일지 몰라도 구세대와 신세대의 문화적 갭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사건이다. 『UN...』은 그렇게 특별히 칭찬을 해야 할 구석도 특별히 비난을 해야 할 구석도 없는 만화지만, 무겁고 심각한 소재보다는 가볍게 웃고 즐길 수 있는, 그러면서도 깔끔한 그림체를 선호하는 1990년대 후반 이후의 만화독자들의 취향이 교과서적으로 반영되어있는 만화라는 점에서 젊은 세대의 취향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춰봐도 나쁘지 않은 작품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