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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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학원 천국

여성만화가가 남자만화(순정만화의 대극점으로 설정한 임의의 명칭.) 계열에서 활약할 때에, 그 이점은 소년만화보다는 청소년, 청년지에 실리는 작품들에서 잘 드러난다. 이들 잡지들이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정 묘사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고 연령층의 남성독...

2002-03-05 하성호
여성만화가가 남자만화(순정만화의 대극점으로 설정한 임의의 명칭.) 계열에서 활약할 때에, 그 이점은 소년만화보다는 청소년, 청년지에 실리는 작품들에서 잘 드러난다. 이들 잡지들이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정 묘사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고 연령층의 남성독자를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플라스틱 해체고교』에 이어 99년부터 니혼바시 요코가 코단샤의 「영 매거진」에 연재하기 시작한 『극동학원천국』은 작가의 전작에서 그러한 장점을 계승하고 있다. 제목은 만화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지금이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유명한 오다 에이이치로의 모험 활극 『원피스』도 잘 알려지지 않았을 무렵에는, 제목만 듣고 "패션계의 최고봉이 되기 위한 젊은 디자이너들의 치열한 경쟁담"을 그린 만화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극동학원천국』이라는 제목에서 가장 처음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는...그렇다. 그 유명한 『머저리들의 블루스』,『크로우즈』 등으로 대표되는 장르, 학원폭력물인 것이다. 여기에 단행본 표지까지 곁들이면 『극동학원천국』이 가벼운 터치의 학원폭력물일 거라는 혐의는 점점 짙어지고, "문제아 수용소같은 학교에 어느날 찾아온 의문의 전학생" 이라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설정에까지 이르면 더 볼 것도 없이 여겨진다. 그러나 조금만 더 지켜보자. 학원폭력물의 왕도전개의 제 1보, "학년간의 대립" 의 재현으로 보이는 학년대항 식권 쟁탈전에서, 전입생 신고를 받아들인 리치 이하 고시키다이 고교 2학년들의 행보는 이색적이다. 상대 학년의 지정 장비품을 전리품으로 삼기 위해 혈안이 되어 주먹다짐을 벌여야 할 건달들은 어디로 가고, 초반부의 분위기로 어렴풋이 느껴졌던 캐릭터간의 갈등이 조금씩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3학년 회장 키도의 농간(?) 속에서 하나 둘씩 드러나는 등장인물들의 상처와 정서적 결함(당사자인 키도 역시 예외는 아니다.)은 이 작품에 있어서 "액션씬"에 대한 기대를 비로소 버리게 만들며 이 무리들이, 그 유쾌함 이면에 존재하는 스스로의 인생의 무게를 어떻게 짊어져 나갈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쟁탈전 막바지에 나누는 키도와 싱고의 대화들에서 치유와 극복의 가능성을 비춰주는 동시에, 막판승부의 과정을 흥미 있고 발랄하게 그려나가는 작가의 연출적 균형감각도 썩 괜찮아 보인다. 이렇게 1부격인 식권쟁탈전이 끝나고 나면 찾아오는 것은 극동교육회의 고시키다이 고교 폐교령 선언. 식권쟁탈전을 통해 서로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로 유대를 다진 주인공들에게 다가오는 것은 "문제아 수용소" 고시키다이에 대한 보수적 외부의 압력이다. 키도, 싱고와 리치 이하 고시키다이의 "문제아"들은 그들의 삶의 방식이 그릇되지 않았음을 증명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무리"를 통해,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의 증명을 위한 투쟁을 시작한다. 그 투쟁의 과정이야말로 "불완전한" 그들을 보다 완전에 가까워지도록 만들 치유와 극복의 기록인 셈이다. 환경이 인격형성에 끼치는 영향은 분명 지대하다. 그러나 결국 한 개인을 올바르게 성장시켜나갈 수 있는 것은 그 자신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이 비판하는 것은 입시위주의 교육현실도 아니오, 보수적인 기성세대의 가치관도 아니다. 이것들은 각성하지 못한 주인공들에게 자극을 던지기 위한 도구로서 대치하고 있을 따름이다. 올바른 교육환경이 저러한 각성을 촉구시킨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ꡒ더러운 공기로 숨을 쉬어도 혼만 썩지 않는다면...ꡓ이라고 외치는 작가의 메시지, 자아성찰에의 촉구는 다름 아닌 이 책을 읽을 청소년 자신을 향한 것이다. 그렇다. 혼만 썩지 않는 다면, 겨울처럼 살더라도 반드시 봄은 찾아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