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신부의 전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불확실한 현재와 희망이 없는 미래. 어느 쪽이던 사람은 선택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무분별한 폭력이나 끝없는 자폐증 같은 철저하게 배타적인 방향으로 도피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런 극단적인 상황들에서 사람들이 보여주는 특이한 반응을 상상을 곁들여서 만화에서 그려내는 것에는 항상 강렬한 임팩트가 부여되기 쉽다. 대 다수의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만화는 그런 극단적인 상황 위에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사랑이란 감정과, 이성이란 전제하에 성립하는 신앙이란, 좀 더 정신적인 것에 대한 미묘한 논쟁점을 살짝 섞어 넣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게 꾸며 놓았다. 물론 그리 심각하다 싶은 정도는 아니고, 독백이나 겉 멋 대사도 적절히 때때로 나오기 때문에 보는 입장에 있어서 지나치게 감정이 격양될 일은 드물다. 작가 스스로가 그리고 싶은 데로 그리는 것에 대해서 독자가 불만을 갖는 것은, 작가가 지나치게 자신을 드러내거나 작가가 강요하는 취향이 독자에게 맞지 않을 때, 뿐 일 것이다. 물론 특정 종교적인 신념을 가진 사람에겐, 보통 이 만화는 그리 좋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작품일 것이다. 하지만, 이 만화는 과연 단순한 가치관의 왜곡과 비판 위에 성립하는 작품일까? 이 만화의 주인공은 (종교적으로 보면) 소위 ‘타락한 성직자’이며, 자신이 처한 불행과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기타 다른 존재들을 저주한다. 소위 평온한 안식을 기원하는 기도와 설교도 그에겐 더 이상 들리지 않고, 그는 소중한 것을 잃은 끝없는 분노에 몸을 맡긴 체, 자신을 유혹한 존재에 대해서 파멸의 길을 걷듯이 ‘광기의 복수’에 나선다. 설령 그 결과가 자신의 파멸이고, 정말로 이 만화가 ‘신’이 ‘자신을 배척한 자들’끼리 싸움을 시켜서 서로 잡아먹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이율배반적인 ‘어둠의 설교’와 같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를 사로잡고 있는 이 불행에 대한 분노는 누군가에 의해 계획되고 꾸며진 것임에도 불구하고도, 그는 그 복수의 순간에 충실하다. 하지만, 그 역시 암흑면을 통해서 ‘전도’된 것이고, ‘신’의 뜻의 한 부분일 것이다. 물론 이 만화에서 신은 작가이니까, 작가의 암흑면과 그에 준하는 ‘의사’에 의한 것이겠지만. 소위 신앙의 대상인 한 종교의 신에게 불행을 부여받은 주인공이 어떤 불행을 갖게 되건, 그 건 신의 뜻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 만화 안에서 구체적인 특정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는 없다. 그리고, 주제가 종교적인 신앙과 사랑의 사이에서 태어난 비극이나, 극한 상황에서 인간이 갖게 되는 묘사 등에 있다고 해서 아주 심각한 내용은 아니다. 철학적이라기보다는 본능적이고, 이성은 남아 있지만 그 이성을 능가하는 분노와, 인간이 갖는 다른 악의적인 힘들이 넘치는 작품이다. 이 만화의 신, 즉 작가가 만들고 싶은 것은 다른 가치관에 대한 배격이 아니라, 일반적으로는 실제로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표현일 뿐이다. 사실 불경한 말 몇 마디나 표현 몇 가지로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처음부터 그리 신성한 것도 아닌 것이다. 요컨대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믿는 사람의 마음 안에만 존재하는 ‘그런 것’일 것이다. 모 철학자가 신은 죽었다고 역설했듯이, 주인공에게 다가오는 시련과 불행, 고통은 계속 되지만, 그런 지나친 전개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전적으로 작품의 ‘신’에 해당하는 작가의 역량에 따르는 것이다. 결국 이 만화의 그런 종교적, 철학적인 코드는 그저 장식일 뿐이다. 이 만화가 재미있는 이유는 작가가 생각해낸 불행의 이야기가 얼마나 잘 통하느냐에 대한 반증이며, 작가 특유의 히어로 상에 대한 묘사가 얼마나 훌륭하냐에 따라 재미의 양도 바뀔 것이다. 사실 히어로는 의외로 고독한 것이다. 남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해서 싸운다는 자체도 어떻게 보면 모순적인 것이고, 그렇다고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과연 멋진 것인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으니까. 확실한 것은, 이 만화의 주인공은 세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광기와 만족을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만화의 주인공은 다크 히어로가 아니라 안티 히어로의 위치에 서 있다. 사람들이 모두 원죄를 지고 있다면 누군가가 그 것을 대신 속죄 받거나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이 만화의 세계관에서는 그렇다. 자신이 있는 곳이 빛인지 어둠인지도 모르는 사람들 중에서, 음지로 떨어진 어둠 속의 누군가가, 자신 이외의 또 다른 암흑을 모두 없애는 것으로, 빛이 넘치는 세계가 유지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음지에 떨어진 누군가에겐 그 것은 악몽의 반복일 뿐이고, 슬픈 숙명일 뿐이다. 그리고, 이 만화는 그런 악몽들에 대한 기록일 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음지에 떨어진 자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즐거워하고 재미있어 하지만, 그 위로 이런 것을 보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통해서 속죄를 하는 것이리라. 억지로 끼워 맞춰 보면 이 만화는 지나치게 체제에 대해서 반항적이다. 어쨌든 그런 반골 정신이 넘치는 하드보일드 히어로 물의 매력과, 이 각박한 세상에 대한 ‘파멸과 재생’에의 희망이 이 작품 안에 넘치고 있다. 물론 소위 티끌하나 없는 멋진 히어로는 신화에만 존재한다. 고대의 신화나 전설의 영웅이 아니라, 각박한 현실에 근접한 ‘하드보일드의 땅’에 떨어진 히어로에게 이런 어두운 면은 빼 놓을 수 없는 것이리라. 하지만, 주인공의 고독한 싸움이 어떤 결과로 끝난다고 해도, 사람의 무지에 의한 행복과 그 뒤에 숨은 ‘어두운 유혹’은 계속 될 것이다. 그러면 또 누군가가 유혹에 넘어가서, 또 다시 ‘흑신부’가 되어서 이 만화가 그려내는 세상의 어둠 속에서 싸울 것이다. 이 만화가 주목 대상이 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이 만화의 가장 큰 판매 포인트는 역시, 이 작품 이전의 한국 만화에서는 보기 드물던 만화 특유의 과장된 폭력성과 액션 성에 있다. 아주 연출적으로 뛰어난 동세를 보여주거나 하지는 않고, 오히려 끊어지는 자잘한 디테일의 장면들의 연속에 의한 특징적인 면모가 강한 작품인데, 그 위에 작가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거칠은 느낌의 그림체가 잘 꾸며져 있어서 눈요기거리로도 상당한 매력이 있다. 그리고, 그 그림 위에서 지나친 미화 없이, 정갈하게 꾸며져 있는 섬뜩함과 미묘한 가학적 성향이 어우러진, 소위 ‘피에 서린 마음’이 자아내는 극한 폭력의 카타르시스에 근접하고 있다. 과거『데빌 맨』 등의 일부 만화에서 볼 수 있던 폭력 극한의 카타르시스를 국내 만화에서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만화의 가치는 크다.『베르세르크』니 다른 일본 만화의 영향을 따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그런 작품의 영향보다는 차라리 미국 만화들이나 영화들의 영향이 더 큰 작품이다. 그리고,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역시 이 작품은 신앙이나 철학보다는, 인간 개인의 마음속에 감춰진 무한한 욕구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니까. 일상에선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처절한 욕구와 감정의 분출을 대리 체험하는 것 뿐이니까. 사실 영화 같은 작품이란 소리도 나름대로 많이 듣고, 작가도 스스로 자신이 여타 B급 호러영화에서 받은 영향을 숨기지 않지만, 실제로 이 『프리스트』는 ‘영화 같은 만화’라기보다는 딱 끊어지는 연출에 의해 그 정적의 감각이 극대화되는 ‘정지 화면’과 나레이션의 조화가 중요시되는 미국 만화의 영향이 더 큰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영화 감독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 게임이나 만화에 몰린다는 소리도 있지만, 이 만화는 그런 어줍잖은 영향 명제들보다는 영화적 감각의 만화적 실현에 나름대로 또 하나의 방향을 제시한 것뿐이다. 그리고, 그 방향이 먹혀 들어갔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팬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것이지, 굳이 따로 존재하는 영화와 만화의 두 매체를 끌어다가 연관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만화는 아직 ‘현재 진행형’인 만화이다. 완결된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 이야기되지 않은 부분도 많이 남아 있고, 결말에 대해서 꽤 많은 전제와 무리수가 따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 만화가 품고 있는 심각하고 Dark한 전개보다도, 작가가 스스로 자신의 변화를 숨기지 않는 다는 것이다. 작품 내부에서는 극악하게 주인공을 괴롭히며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가다듬지 못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