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리
벽초 홍명희는 참으로 재주가 많은 인물이었나 보다. 비록 북으로 건너가기는 했어도 『임꺽정』이라는 걸출한 소설을 남겨서 후세의 많은 만화가가 먹고 살 길을 열어주었으니 말이다.『삐리』는 이두호의 『임꺽정』, 방학기의 『대도 임거정』에 이어서 백성민이 그려내는 또 하나의...
2002-02-18
김재원
벽초 홍명희는 참으로 재주가 많은 인물이었나 보다. 비록 북으로 건너가기는 했어도 『임꺽정』이라는 걸출한 소설을 남겨서 후세의 많은 만화가가 먹고 살 길을 열어주었으니 말이다.『삐리』는 이두호의 『임꺽정』, 방학기의 『대도 임거정』에 이어서 백성민이 그려내는 또 하나의 임꺽정이다. 『삐리』라는 작품의 타이틀은 등장인물 중 하나인 퉁소쟁이 여얼의 딸의 이름이다. 백성민의 다른 작품인 『토끼』가 제목만 보고는 ‘홍경래의 난’을 다룬 것이라고는 짐작할 수 없는 것처럼 『삐리』역시 임꺽정을 다룬 것이라고는 쉽게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작품 자체만을 놓고 볼 때 『삐리』는 장편은 아니다. 임꺽정이라고 하는 인물의 일부 시기많은 나름대로 해석해서 극화한 소품이랄까. 주인공보다 곁들이로 나오는 인물의 묘사에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는 것도 그런 인상을 강하게 만들어준다. 경기도 양주 땅에 한 분이 있어 위로 딸 하나를 두었으나 십수 년을 득남치 못하매, 장지를 품고 집 뒤 와우산 쇠뿔 바위에 백일 치성하니, 황소를 품는 특이한 몽조를 얻은 결과에 마침내 득남하매, 형상과 골격이 범상치 아니하나 그 성정이 사납고 심술스러워 걱정거리라 통탄하더니 별호가 뒤에 이름이 되어버리니 그 이름이 림꺽정이라, 칠 팔세가 되매 그 용력이 도도하야 십여세 된 아해들까지 능히 제패하더라. 백성민의 만화는 상세한 설정이나 매끄럽고 탁월한 스토리텔링 보다는 장면장면의 임팩트로 승부한다. 아니 탁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으리라. 그의 그림이 주는 인상이 너무 강렬하기에, 컷과 컷의 비약이 심하기에 스토리는 뒷전으로 물러앉게 된다는 것이 더 옳바른 표현이다. 화력으로는 남에게 뒤질 생각을 애당초 하지 않을 이두호나 방학기의 그림보다 더 강렬하고 거침이 없다. 『삐리』에서 그의 그림은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삐리』의 세째마당 개발코 동모 에서 무과에 급제한 청년 남치근 - 나중에 임꺽정을 토포하게 되는 인물 - 이 마장동에서 격구시합을 벌이는 장면은 그런 박력의 극치다. 정적이 감돌고 있는 너른 마당에 말을 타고 손에손에 봉을 쥔 젊은 장정들이 눈을 새파랗게 빛내며 도열해 있다. 그 중간에는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는 기생이 하나. 그녀의 춤사위가 급해질 수록 구경하는 이의 눈에는 핏발이 선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서 나무공 하나가 팔매되어 하늘로 날아오르자 일제히 말을 몰아 달려든다. 이 장면을 영화로 표현한들 이렇게 긴박감 있게 다가오지는 않으리라. 정적 속에서 기생의 날렵한 춤사위로 다시 나무공의 궤도를 그리는 움직임에서 말과 기수의 질주로 이어지는 장면의 전환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일인양 생생하다. 『삐리』는 다른 작가의 임꺽정과는 달리 임꺽정의 화적떼생활까지 그리지는 않고 그가 청년으로 성장하게 되는 단계까지의 과정만을 그리고 있다. 『삐리』의 임꺽정은 이두호나 방학기의 임꺽정에 비해서 거칠다. 투박하다는 점에서는 다른 작품의 인물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지만 철이 없는 어린 아이라는 점에서 성인 임꺽정과는 차별된다. 오히려 『삐리』에서 성인 임꺽정에 해당하는 인물이라면 과인한 용력을 감당 못해서, 들끓는 피를 참지 못해서 밤이면 밤마다 산골짝으로 들어가 몸을 풀어야만 하는 괴력의 여인, 임꺽정의 누이 복례가 아닌가 싶다. 남보다 뛰어난 힘을 갖고 있거나 뛰어난 머리나 용모를 갖고 있는 것이 죄가 되는 세상, 사농공상의 신분체제에도 끼어들지 못하고 지내야 하는 천한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남보다 월등히 뛰어나게 갖게 된 용력을 주체하지 못했기에 복례는 밤마다 용틀임을 해야 하고 옥봉이는 양반님네 첩살이를 하는 신세가 된다. 그런 누이들을 보며 꺽정은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모두를 호령하게 될 날을 꿈꾼다. 그의 꿈이 이루어질 날은 과연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