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의성 부천국제만화축제가 오는 10월 14일부터 17일까지 4일간 열린다. 국내 최대 규모의 국제 도서전과 건전한 만화담론 형성을 위한 학술행사, 그리고 다채로운 참여행사 등이 눈길을 끈다. 특히 만화문화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마련된 다양한 기획전시는 많은 관심을 받는 행사이다. 그 중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마련된 ‘핸드프린팅 전’은 올해 선정된 국내 원로만화작가 10인의 작품과 핸드프린팅 등이 전시된다. 이번 호 만화비평에서는 핸드프린팅 전 참여 작가 중 자신만의 스타일로 형사만화를 독립장르로 분화(分化) 정착시켰으며 60년대 최초의 성인만화작가라는 평가를 받는 손의성 선생을 만나 작가관과 추억담을 듣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신진규 만나뵙게되어 영광입니다. ‘원수의 딸’이 데뷔작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데뷔작이 어떻게 나왔는지, 어떤 계기로 만화를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손의성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만화가 거의 없었어요. 만화가는 물론이구요. 그러던 중 일본과 미국의 만화가 조금씩 유입되고 하던 차에 나도 만화를 그릴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어요. 작품을 한번 해볼까하고 원고지에 만화를 그렸지요. 그걸 출판사에 가져가게 되었는데 의외로 괜찮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는 출판사에서 연필로 그려진 걸 펜으로 작업을 해오고 조금 더 정확히 그려서 가져오라고 하더라구요. 그게 데뷔작인 ‘원수의 딸’이에요. 출판사 사장님 눈에 내 작품이 괜찮게 비춰졌나 봐요. 그리고는 용돈 수준의 원고료를 받았어요. 그 후에 출판사에서 이런 작품을 좀 더 체계적으로 그려서 가져오라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만화인생이 시작된 거죠. 신진규 어린 시절부터 만화를 좋아하셔서 학창 시절 재밌었던 일이 많았을 것 같은데. 손의성 학창시절이라. 허허 조금 창피한 얘긴데...그땐 수업시간에 매일 만화만 그렸어요. 그러다 선생님께 들켜서 혼나기도 많이 혼났지. 한번은 시험을 치는데 만화가 그리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시험지 앞엔 답을 쓰고 뒷면에 만화를 그려서 제출한 적도 있어요. 그리고 영화도 참 좋아했어요. 그 시절엔 머리를 빡빡 밀고 모자 쓰고 영화관에 많이 갔더랬지. 그때 본 영화들이 만화 그리는데 많은 도움이 됐어요. 실제로 그 시절 만화가 수동적인 형태가 많았었는데 영화는 역동적이잖아요. 그런 움직임을 그려보고 싶었는데 영화를 많이 본 덕에 그런 움직임을 만화에 많이 응용했어요. 그래서 내 만화가 동적인 만화가 된 거죠. 신진규 중학교 3학년 때부터의 꿈이 만화가였다고 들었습니다. 만화를 배우실 때 어려움이 많으셨을 걸로 생각되는데. 손의성 그 당시엔 만화가가 없을 때니깐 누굴 찾아갈 사람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었어요. 동강초등학교 앞에 동강 인쇄소라는 곳이 있었는데 거기서 박광현씨가 화공으로 있었어요. 그래도 인사만 하는 수준이지 찾아가서 그림 좀 가르쳐달라고 엄두도 못 냈죠. 그래서 당시 그림 좀 잘 그린다고 하는 분들의 만화를 스스로 연구해서 그리곤 했어요. 그리고 그때는 그림을 펜으로 그리지 않고 붓으로만 그렸어요. 그래서 상당히 힘들었지요. 선이나 동그라미 같은걸 붓으로 다 그렸어요. 그런 시절이 있었지요. 또 당시엔 먹물을 물감 파는 곳에서 사서 집에서 끓여서 썼었어요. 그런데 이게 침이나 물, 땀 떨어지면 다 번지는 거야. 그럼 열심히 그린 그림 완전히 망치는 거지요. 고생고생을 하다가 김학수라는 만화가가 있었는데 그 사람 먹물은 번지지를 않는 거에요. 아무리 가르쳐 달래도 가르쳐주질 않아서 계속 그렇게 지내다가 먹물 파는 가게 주인한테 알게 된 비법이 먹물을 끓일 때 소금을 넣어서 끓이면 먹물이 안 번진다는 거야. 정말 그렇더라구요. 그때부터 후배나 동료들에게 알려줬지. 신진규 그 외에도 연구를 많이 하시면서 발명하시게 된 것이 있다고 하던데요. 손의성 대나무 펜을 내가 개발했어요. 우리나라 옛날 만화엔 의성어가 없었거든요. ‘앗! 엇! 에잇!’ 같은 지금은 흔히 쓰이는 말들이 그 당시엔 없었어요. 그래서 그걸 일일이 손으로 쓰려니깐 힘이 들어 곰곰이 생각하다 식당에서 대나무 젓가락을 들고 연구를 했지.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가 젓가락을 가는 펜으로 깎았는데 그게 대나무 펜이 된 거죠. 이후로 내 만화에서 의성어를 자유롭게 사용하게 되었지. 그러니까 이게 실감이 나는 거죠. 총성도 ‘타다탕’하는 식으로. 그땐 이런 말 자체를 안 썼으니 신기하고 그랬어요. 이후로 많은 작가들이 사용하게 됐지요. 신진규 선생님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많은 팬을 확보하고 계신데요. 선생님의 작가관이랄까 작품세계 혹은 만화를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신지요. 손의성 제 작품세계는 아주 특이하다고 할 만한 것은 없어요. 굳이 꼽자면 일본하고 관련된 만화를 많이 그렸지요. 시대 만화를 빼 놓고는 ‘매국노’나 이런 것을 소재로 그리면서 독립만화를 많이 그렸어요. 아무래도 시대적 상황들 때문에 일본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들이 많아서 그게 소재가 많이 되었고 독자들도 그런 만화를 좋아하더라구요. 신진규 선생님 작품에 영향을 끼친 작가가 있으신지요. 손의성 크게 작품에 영향을 끼친 분은 없지만 그림 그릴 때 김용환 선생 같은 분의 만화를 좋아해서 많이 보긴 했어요. 그리고 ‘동경 4번지’부터는 독자적인 장르를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신진규 마지막으로 후배들과 독자들에게 한 말씀. 손의성 요즘 후배들은 다들 잘해서 특별히 부탁하거나 할 건 없어요. 한 가지 꼽자면 일본만화를 너무 베끼다 보니 한국 만화다운 만화가 없는 것이 조금 안타깝네요. 그리고 아이들이 만화 보는 걸 어른들이 무척 싫어하시는데 실상 어릴 때 만화를 많이 본 아이들이 학습능력도 뛰어나고 독서하는 습관도 기를 수 있어요. 잘못 알려진 만화의 저질성이나 폭력성만을 보지 말고 만화의 좋은 점을 많이 고려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상정
만화평론가 인천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