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 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 - 우리는 영웅이 필요 없는 사회에 살고 있는가?
이 글이 만화 리뷰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한 가지 고백을 하려 한다. 사실 의도가 명확한 작품에 화두를 던진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비평가는 남들이 보지 못한 틈을 발견하고 전달하면서 돈을 받는 사람인데 <홀: 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이하 <홀>)는 아직 살아있는 사건에 종속되어 있어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는 게 참으로 힘들다. <홀>의 영웅 ‘김동수’와 의인 김동수 씨를 분리하는 작업이 과연 옳은 일인지 지금까지 확신이 안 선다. 그런데도 감히 이것이 내 책무라 믿고 작품을 이야기하려 한다.
하루는 이런 생각을 했다. ‘왜 우리 시대는 영웅에 열광하면서 실제 영웅이 탄생하지 않는 걸까?’ 영웅은 공동체를 위협하는 치명적인 악당을 전제한다. 즉 무엇이 선후인지는 모르지만 영웅과 악당은 동시에 존재해야만 한다. 그래서 영웅을 필요로 하는 혼란보다 웅이 필요 없는 질서가 우리의 안녕을 위해 훨씬 이득이다. 미국의 슈퍼히어로가 세계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태어나 황금시대를 맞이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국내의 경우 홍길동, 일지매, 각시탈 등 70~80년대 억압의 시대에 태어난 슈퍼히어로의 이름을 꼽을 수 있지만 미국, 일본과는 달리 그들이 영화를 통해 지금까지 이어지진 않는다. 대신 오늘날 한국의 영웅은 ‘평범한’, ‘소시민’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국가, 외세, 재벌, 연쇄살인마와 싸운다. 즉 이들을 영웅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웅이 필요 없는 평화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일까?
만화 <홀>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홀>은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파란 바지 의인’이라 알려진 김동수 씨의 이야기를 각색한 작품으로, ‘김동수’의 행적과 사고 이후 ‘김동수’의 가족들의 이야기로 사건을 구성한 작품이다. 평범한 아버지가 소방 호스를 이용해 20여 명의 학생을 구조한 이야기는 무능한 정부를 대신해 시민을 구한 (영웅이 아닌) ‘의인’의 이야기다. 하지만 ‘김동수’는 7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월호라는 홀에 갇혀있다. 더 많은 사람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자책은 그가 자해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그로 인해 그의 가족마저 홀에 빨려들어 갔다.
크리스토퍼 보글러의 ‘영웅의 여정 12단계’를 빌려 바라볼 때, <홀>은 영웅 ‘김동수’가 보상이 아닌 저주의 낙인을 얻고 돌아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영웅은 특별한 세계로 떠나 시련을 이겨내고 진정한 영웅으로 각성한다. 이후 악을 물리친 후 전리품을 얻고 영웅은 일상으로 복귀해 원래의 삶을 살아간다. 이 사이클이 <홀>에서는 완전히 뒤집힌다.
작품에서 어떤 사람들은 시민을 구해낸 의인을 욕하고 손가락질하며 그를 괴물로 만들어 버린다. 다 털어내자며 가족들과 여행을 떠난 ‘김동수’가 또다시 세월호라는 홀로 빨려 들어가는 엔딩을 생각해보자. 의인은 마지막까지 보상은커녕 저주를 받아 평생을 괴로워한다. 평범해지는 것조차 바랄 수 없게 된 ‘김동수’의 비극은 만화의 모체인 세월호 침몰 사고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판타지가 될 수 없다.
지난 2010년대는 국가가 먹고 사는 문제로 사람을 찍어 누르던 시대였다. 학부 시절 어떤 교수께서 말씀하시길 “과거 군부는 사람을 납치해 남영동에서 패 죽였다면, 지금은 사람의 밥줄을 끊어 굶겨 죽이고 있다.”라고 하셨다. 그때는 감탄으로 끝났던 이야기가 30대가 되니 피부에 와 닿는다. 전시된 육체의 고통보다 더 두려운 건 먹고 살아갈 수단을 빼앗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게 만드는 것이다. 알아서 말라죽으라는 사형선고에 사람들은 ‘그러니까 왜 나대가지고.’라며 손가락질한다. 그러면서도 평범한 가장이라 불리는 영웅이 등장하는 작품은 왜 이렇게 인기가 많았는가. 그게 지난 2010년대의 모습이었다.
<홀>은 비극으로 ‘김동수’라는 영웅의 숭고함을 표현하기보다 의인 김동수 씨의 절망과 고통을 전달하는 데 목적을 둔다. 작품은 마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듯 클로즈업도, 롱쇼트도 아닌 미디엄 쇼트만 사용하여 덤덤하게 주변 인물들의 말을 전달한다. 주인공의 내면 또한 작가가 직접 표현하는 것이 아닌 그의 가족들의 시선으로 우회한다. 영웅의 이야기지만 최대한 그렇지 않도록 실제 가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조심스럽다. 이는 언론이 의인이라며 김동수 씨를 띄워주지만, 그 수면 아래 네티즌들은 익명이라는 무기로 그와 세월호 유가족들을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촛불로 탄생한 현 정부마저 이 사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홀>은 강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소시민 아버지가 악당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가정으로 복귀하는 행복한 판타지가 왜 <홀>에서는 허락되지 않을까. ‘김동수’는 세월호라는 홀에 모든 것을 빼앗겨버렸다. 생계수단인 화물차가 바다에 침수되었고, 더 많은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트라우마가 되어 이를 지켜보던 가족들에게까지 옮겨갔다. 아버지의 자살 기도를 마주한 딸의 충격은 어땠을까. 딴사람이 되어 돌아온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마음은 어떨까. 빙글빙글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소용돌이처럼 <홀>의 비극은 독자를 현실의 부조리에 도착하게 만든다.
<홀>은 왜 우리 사회에 영웅이 등장할 수 없는지 물음을 던지는 작품이다. 세상에는 분명 악당이 존재하고 악당이 저지른 부정이 공동체의 안녕을 위협한다. 다행인 건 그럴 때마다 영웅이 나타나 우리를 지켜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은 영웅의 이름을 지운다. 영웅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죽었고, 고문당했고, 생업을 빼앗겼다. 그 학습된 경험이 대중 스스로 수많은 영웅들의 이름을 지우도록 만들었다. 대신 대중은 ‘소시민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대신에 영웅을 찬양했다. 그래야만 이 사회가 영웅이 필요 없는 정상적인 사회로 보이기 때문이다. ‘김동수’가 김동수 씨가 되는 과정을 왜 이렇게 서글퍼야만 할까. 이제 그를 의인이 아니라 영웅이라 부르는 것에 망설이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