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심한 나’를 ‘괜찮은 나’로 바라보는 시선, <친하게 지내자> (영일)
여기 한 남자가 있습니다. 나이 꽤나 먹고도 방구석에서 빈둥거리기나 하는 남자. 직업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안 팔리는 로맨스 소설 작가라는 게 흠은 아니지만, 그런 소설 쓰기마저도 게으름 피우느라 마감을 못 맞추는 남자.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어 보이는 주제에 조카를 데리고 사는 이 남자는, 애 때문에 일찍 일어나는 게 싫어서 교사에게 등교 시간을 미뤄달라고 찡얼대는 남자입니다. 한심합니다. 이토록 한심한 이 남자가 바로, <친하게 지내자>의 주인공 ‘이한수’입니다.
한심해서 나잇값도 못하는 ‘한수’와 달리, 나이답지 않게 의젓하고 똑똑한 아이가 있습니다. 삼촌 한수와 함께 사는 조카 ‘모나’가 바로 그런 아이입니다. 아홉 살 모나는 흔들리는 이도 알아서 잘 뽑고, 전학 간 학교에서도 알아서 잘 적응하고, 식사며 목욕이며 생활의 필요들도 알아서 척척 챙기고 요구할 줄 압니다. 참으로 아홉 살답지 않은 아이지요. 심지어 집에 돌아다니는 바퀴벌레도 알아서 잘 잡는다니까요!
<친하게 지내자>는 이토록 야무진 애어른 ‘모나’와, 바퀴벌레를 보며 무서워 떠는 어른애 ‘한수’가 함께 일상을 꾸리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한수의 누나이자, 모나의 어머니인 ‘한나’가 세상을 떠나면서부터, 삼촌 ‘한수’와 조카 ‘모나’는 함께 살게 됩니다.
한심한 어른인 ‘한수’가, 조금은 갑작스럽게 조카 ‘모나’를 맡게 되면서 그의 생활은 우당탕 천방지축으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혼자 살 때는 대충 굶고 청소도 안 하고 한심하게 살아도 괜찮았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조카 ‘모나’를 돌보며 보호자 노릇을 해야 하니까요. 어설프게나마 계란말이도 해서 먹여야 하고, 츄리닝 위에 재킷이라도 걸치고 학교에 데려가야 하게 된 것입니다.
‘한수’는 한심한 남자지만, 나쁜 인간은 아닙니다. 이러니저러니 하면서도 ‘모나’ 밥 챙겨준다고 어설픈 요리를 하고, 비 오면 우산도 챙겨서 데리러 가고, 이빨 요정을 믿는 ‘모나’의 순수한 마음도 지켜줍니다. 돈이 없어서 욕조 딸린 화장실에서 ‘모나’를 키울 수 없는 형편이지만, 눈치 보며 작은 대야를 고르는 ‘모나’에게 커다란 빨간 고무 대야를 사줍니다.
비록 너무 큰 걸 사서 ‘인테리어 -500’이 되긴 했지만, 형편은 안 좋아도, 아이에게 이왕이면 좋은 걸 사주고 싶은 어른의 마음은 그런 것입니다. 의젓한 애어른 ‘모나’와, 한심한 어른애 ‘한수’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아이에겐 아이의 자리가 있고, 어른에겐 그런 아이의 자리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한수’는 마냥 한심하지 않습니다. 딱히 모범적인 어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어른스럽지 않으면 좀 어떻습니까. 사실 ‘어른스럽다’는 건 성인이 되어도, 서른, 마흔이 넘어가도 어렵다는 걸, 나이 먹은 우리는 다 알고 있지 않던가요.
어쩌면 ‘한수’를 한심하게끔 만드는 것은 세상의 시선일지도 모릅니다. 서른이 넘었으면 결혼을 해야지, 로맨스 소설가 말고 번듯한 직업을 가져야지, 아이는 부모가 키워야지, 아이는 좋은 집에서 번듯하게 길러야지, 하는 그런 세상의 편견들. 그 편견의 틀에서 보면 ‘한수’는 어느 것도 번듯하게 해내지 못하는 ‘한심한 인간’일지도 모릅니다. 어른스럽지도 않고, 번듯한 보호자라고 할 수도 없지요.
그런데, 정말로 그런가요? 아이의 보호자가 되려면 ‘번듯한 어른’이어야만 하는 건가요? 그래야만 사랑해줄 수 있고, 그래야만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건가요?
‘한수’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같이 별 볼 일 없고, 돈도 없는 인간은 아이를 돌볼 자격이 없기 때문에 ‘모나’를 친가에 맡기려고 했습니다. 자기같이 한심한 인간은 사랑할 자격도, 사랑받을 자격도 없다고 움츠러들었습니다. 그런 한수에게 송주씨는 소리칩니다. “작가님은 진짜 그게 문제세요. 왜 자꾸 본인이 아무것도 아니다 생각하시냐구요. 이건 자격의 문제가 아녜요, 아시겠어요? 제가 지금껏 살아온 시간과 마음이 작가님을 임명한 거예요. 작가님이 제 인간대표라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시험에 합격해야만 허락되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사람을 알게 되고, 그 사람과 친해지다 보면 ‘사랑’하게 됩니다.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그 사람의 사소한 웃음과 한심한 말투마저 귀여워 보이는, 그런 게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자격이 필요 없습니다. 태어나서 살아가는데 자격이 필요하지 않듯. 살아가는 자들은 마땅히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만큼은 ‘인간 대표’가 됩니다.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빛나고 특별해지는 항성(恒星)이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이 어두운지 밝은지, 행복한지 아닌지를 판별해주는, 삶의 기준점이 되는 거지요.
그 순간 우리는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납니다. 번듯한 자격이 없는 너는 한심하다고 손가락질하는 세상을 향하여, 그런 게 없어도 내가 나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괜찮다고 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한수’의 자전적 소설, 한수와 닮은 가상의 인물 ‘수한’이 나오는 작품의 이름은 <괜찮은 남자>입니다. ‘한심한 남자’인 한수가 쓴 작품이 ‘괜찮은 남자’라는 것은 아이러니합니다. 소설의 내용은 괜찮지 않은 현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한심한 남자’인 한수의 삶을 잘 반영하고 있기도 하지만요.
‘괜찮은 남자’라는 이 가상의 작품명은 <친하게 지내자>의 떠받치는 하나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현실은 도저히 괜찮지가 않습니다. 낭만적인 디즈니 세계관이 아니기 때문에, 돈이 없어 구질구질해지기도 하고, 말실수로 상처주기도 하기도 합니다. 현실의 사랑이란 그렇게 번듯하기만 한 것이 아니지요.
그러나 번듯하지 못하면 또 어떤가요. 우리 모두 ‘번듯한 사랑’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심한 나’일지라도 그 사람에게만큼은 제법 ‘괜찮은 나’로 받아들여지는, ‘괜찮은 사랑’을 하면 됩니다.
그런 사랑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자격이 아닙니다. ‘한심한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사랑해주는 시선은, 함께 마주하는 삶의 결 사이사이에서 피어나고 자라납니다. 친하게 지내다보면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친하게 지내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번듯한 자격을 요구하는 세상에 대항하여, 그 뾰족하고 시린 편견에 대항하여, 그런 것이 없어도 우리는 괜찮을 수 있다고,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친하게 지내자>는 바로 그런 사랑들을 따스하게 이야기해주는 작품입니다.
[이럴 때 보세요] 따뜻한 일상물이 보고 싶을 때, 상큼하게 웃긴 개그물이 보고 싶을 때, 간질거리듯 꽁냥꽁냥 썸타는 HL/GL이 보고 싶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