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네이버웹툰/재혼 황후/히어리&숨풀&알파타르트
<재혼 황후> : K-웹소설·웹툰이 익숙한 클리셰를 가지고 노는 법
“이혼을 받아들이겠습니다 - 그리고, 재혼 승인을 요구합니다.”
최근 새롭게 등장한 웹소설과 일군의 미디어믹스의 특징을‘클리셰의 적극적인 차용과 전복’으로 정의하고 싶다. 그동안 약점으로 치부되던 것을 애써 부정하고 축소하는 대신, 단점을 당당하게 앞세우고 도리어 장점으로 승화하는 작금의 웹소설 및 웹툰의 문법은, 라헬을 부상으로 실격 처리한다는 규정에 맞서 직접 관리자를 찾아간 밤이나 스타스트림의 시나리오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손으로 절대 왕좌를 부순 김독자가 그랬던 것처럼, 다수에게 익숙한 서사를 취하되(차용) 거기에 깔린 고정관념을 뒤집어엎음(전복)으로써 장르적인 쾌감을 선사한다.
동사의 웹소설을 미디어믹스한 네이버 웹툰 <재혼 황후>는, 앞서 말한 특징을 로맨스판타지 장르에서 가장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동대제국의 황후 나비에가 소비에슈와 이혼함과 동시에 서왕국의 왕인 하인리와 재혼하는 내용을 그린 <재혼 황후>는, 얼핏 한 남자에게 배신당한 여자주인공이 자신을 사랑하는 다른 남자를 만나 행복을 찾는 평범한 구도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로맨스의 공식을 적극적으로 따르는가 하다가도 돌연 비틀어 버린다.
[출처] 네이버웹툰/재혼황후/히어리&숨풀&알파타르트
“당신은 황후로서의 정체성이 너무 강합니다.
하지만 황제와 이혼하면 당신은 황후가 아니지요.”
카프멘을 포함한 다수와 나비에 본인조차 내비친 걱정은, 그러나 이혼법정에서 나비에가 소비에슈와의 이혼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하인리와의 재혼을 밝히고 대신관의 승낙을 받으면서 예상을 경쾌하게 빗나간다. 그동안의 착하고 순수한 여자주인공들은 으레 자신을 배신한 상대를 후회하게 하고자 언제나 화려하고 매혹적인 팜므파탈로 돌아와 복수 외에는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에야 식상하다지만 단지 사랑에 만족하지 않고, 제 손으로 상대를 단죄하는 팜므파탈의 모습이 당대에는 통쾌하게 느껴졌으리라는 점과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도 서사로써 여전히 살아남았을 것이라는 점, 나아가 외형만이 아니라 이젠 실력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고 복수하는 등 팜므파탈 서사 또한 함께 발전해 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재혼 황후>는 여기에 가담하여 한 갈래를 제시하기보다도, 최초의 전제를 향해 의문을 던진다. 남자에게 배신당한 여자주인공이 꼭 변해야만 하는가?
<재혼 황후>에서 나비에가 가진 황후로서의 정체성은 그가 소비에슈와 이혼하고 하인리와의 재혼하기까지의 과정에 있어 변함없이 유지된다(애초에 나비에가 하인리와 결혼한 것은 왕비라는 자리를 위해서였지, 소비에슈에게 복수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러니 우리가 그동안 질릴 만치 보아 온 클리셰와는 다르게 여자주인공이 새로운 사랑을 찾고 그를 배신한 상대가 후회하기까지에 있어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해야 할 이유는 사실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웹소설 시대의 로맨스 판타지 속 여자주인공에게 있어 사랑이나 복수와 같은 과거의 동기는 더는 유효하지 않으며, 그렇게 전형적인 삼각관계 속 여자주인공이 자신을 지키면서도 사랑 또한 획득할 수 있음을 주장하면서 <재혼 황후>는 클리셰에 도전한다.
[출처] 네이버웹툰/재혼황후/히어리&숨풀&알파타르트
소비에슈의 정부이자 나비에의 적으로 등장하는 라스타가 도망 노예 출신으로 설정된 것 또한 일반적인 공식과 차이가 있다. 라스타는 냉정한 성품의 부잣집 악역과는 사뭇 달라 원래라면 나비에와 라스타의 위치가 정반대였을 것 같다. 여기에서 <재혼 황후>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출신이 고귀하지 않은 인물에게 악역이 허락될 수 없는가?
그러나 앞과 달리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것은, 개념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클리셰의 반전 및 교란이 자칫 실재하는 사회적 구조 및 불평등을 가벼이 치부하거나 심지는 공고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자. 볼품없는 학벌의 주인공이 명문대를 졸업한 악역을 이기고 최종 선발되는 내용이 지겹다고 해서 그 반대의 내용만이 쏟아져 나와도 괜찮을까? 이는 최전방에서 사회적인 인식을 바꿔야 할 주체-문화-가 도리어 고정관념을 조장하는 꼴일 것이다. 그 영향에 대한 고려 없이 소재에 그치는 설정에서의 반전은, 앞서 언급한 요즘의 웹소설이 지닌 전복적인 특성의 부산물로 종종 언급되며 이는 <재혼 황후>도 마찬가지이다. 질문으로 돌아가, 고귀하지 않은 출신의 인물도 물론 악역이 될 수 있다. 다만 상대가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칼에 찔려줄 수는 없어도, 그 무게까지 같은 것은 아니다.
최근 웹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자주 등장하는 단어로 재혼, 회귀, 악녀, 환생, 서브와 같은 것들이 있다. 나비에와 같은 완성형의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누군가는 성취가 어려운 현대사회에서 대중문화를 통해 대리 보상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를 해석하겠지만, 나는 그보다는 클리셰를 우회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해명하는 대신 이에 정면으로 맞서는 신세대적 감성으로 작품을 해석하고 싶다. 모쪼록 K-웹소설과 웹툰이 인기를 끄는 가운데, 이러한 시도가 과도기를 지나 보다 안정적이고 깊이 있게 자리 잡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