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용병> : 먼치킨 혹은 좋았던 옛 시절
[출처] 네이버웹툰/입학용병/YC&락현
지금은 한 장르로 굳게 자리 잡고 있지만, 먼치킨은 본래 장르를 이르는 말이 아니었다. 먼치킨은 반사회적 ‘파워 게이밍’을 즐기는 성향을 지닌 플레이어를 이르는 말로, 암묵적 규약을 무시하는 플레이를 통해 다른 플레이어를 괴롭히는 ‘트롤링 플레이어’들을 지칭하는 말에 가까웠다. 다만 ‘파워 게이밍’이라는 어감에서 알 수 있듯이 먼치킨들이 깨뜨린 규약은 대개의 경우 시혜 혹은 자비였다.
달리 말하면 먼치킨들은 자비 없는 플레이를 통해 게임 생태계를 교란하는 자들에 가깝다. 누군가는 먼치킨으로 인해 피해를 볼 것이 분명하지만, 먼치킨의 기상천외한 플레이는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구경거리였다. 무엇보다도 금기시되던 일들을 독단으로 해금시킨다는 점에서, 먼치킨의 자비 없는 액션은 호감을 얻는다. 먼치킨에 대한 장르적 판타지 또한 그들의 압도적인 실력보다도,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독단성에 있다.
[출처] 네이버웹툰/입학용병/YC&락현
<입학용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입학용병>의 주인공인 유이진은 작품 내의 단독자이자 독단을 허락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유이진의 주변인들이 고난에 빠지면, 유이진이 나타나 ‘사이다’를 주는 것이 <입학용병>이 에피소드들을 이끌어 나가는 방식이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이미 누구도 유이진에게 쉽게 대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유이진은 마치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보이기도 한다.
<입학용병>이 전시한 유이진의 권능은 시장의 분명한 반응을 얻었다. 네이버 웹툰 일요일 연재 순위 2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글로벌 마켓에서의 유료 회차 결제액은 국내 매출을 넘어섰다. 유이진의 권능을 어떻게 보든, 유이진이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충분한 매력을 지닌 캐릭터임은 부정하기 힘든 셈이다.
물론 유이진의 독단과 권능은 이야기가 시작되기 이전의 과거를 통해 옹호 받고, 나아가 유이진이 지닌 반사회적인 성향은 그만의 매력으로 포장된다. 덕분에 유이진이 지닌 반사회적 성향은 주인공의 성장을 보여주는 척도이자, 에피소드들을 통과하며 그가 변화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요소가 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유이진은 반사회적 인물에서 동사회적 인물로 변해 갈 것이다.
결국 <입학용병>은 독단적 먼치킨이 점차 독단과 단독자로서 살아가던 오늘날을 버리고 과거로 회귀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한마디로 과거로 돌아가는 이야기인 셈이며, 동시에 단독자의 지위를 포기하여 지금 있는 정체성을 버려 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 하필이면 동사회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과거로 돌아가야 하는가? 어째서 유이진의 현재에는 독단의 요소만 허용되는 것일까?
우리는 독단이 무엇인지 잠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독단이란 사전적으로는 혼자서 결단하는 것을 말하지만, 조금만 뒤집어 보면 혼자서 결정해도 되는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즉, 다른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를 지시하기도 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곧바로 안정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만큼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상태이기도 하다.
다른 이들과 구분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예측할 수 없다는 상태를 함축한다. 예측할 수 없으니, 미래를 생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오직 불확실과 불안정으로 가득찬 세계에서 무한히 싸우는 것이, 독단과 단독자의 숙명인 셈이다. 결국, 단독자로서 유이진이 바라볼 수 있는 방향은 과거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
‘지그문드 바우만’은 유작 <레트로토피아>를 통해 미래를 타진할 수 없을 때, 인간은 과거로 회귀한다고 주장했다. 설사 그것이 확실한 실패일지라도 미래를 타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남겨진 가능성이란 과거밖에 없는 셈이다. <입학용병>이 바라보는 판타지의 궁극적인 방향도 그와 같다. 과거가 어떠했든 “좋았던 옛 시절”이었다는 것. 그것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존재하는 먼치킨들의 또 다른 ‘데우스 엑스 마키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