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아이> : 한 편의 판타지 게임 아니면 애니메이션 같은
[출처] 레진코믹스/마법사의 아이/산작약
웹툰 <마법사의 아이>는 한 편의 판타지 게임 아니면 애니메이션 같다. 리뷰를 준비하면서 오랜만에 <마법사의 아이>를 정주행했다. 마치 판타지 게임 <파이어 엠블렘 풍화설월>(닌텐도 스위치), 애니메이션 <소드 아트 온라인>을 정주행한 느낌이다. 굳이 장르로 따지면 중세 서양 판타지 학원물, 주인공을 키워 가는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이라고 할까.
<마법사의 아이>는 레진코믹스에서 연재한 산작약 작가의 웹툰이다. 봉인된 마왕을 부활시키기 위해 마족들은 자신들의 마왕을 봉인한 팔레티온의 대마법사 가이아의 아들을 납치해야 한다. 헤가투스의 마족이지만 마법 능력도 없는 어리바리한 트리샤는 가이아의 아들 해일을 납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울며 겨자 먹기로 팔레티온에 온 트리샤는 해일이 다니는 학교에 잠입하자마자 자신이 마족임을 들킨다. 이제부터 트리샤의 좌충우돌 학교생활이 시작된다.
[출처] 레진코믹스/마법사의 아이/산작약
<마법사의 아이>는 요즘 웹툰 같지 않다. 회빙환(회귀, 빙의, 환생)을 따르지도 않고, 액션신이나 마법 특수 효과도 그다지 화려하지 않다. 주인공이 먼치킨 캐릭터이거나 사이다 전개도 아니다. 독자가 사이다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초반부에 고구마도 잔뜩 먹어야 하고, 반전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스토리는 스피디하지 않다. 그럼에도 <마법사의 아이>는 독자를 웹툰으로 끌어들이기에 충분히 매력적이다.
수려한 그림체는 앞서 말한 대로 한 편의 잘 만들어진 판타지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판타지 장르 클리셰에 충실히 따른 설정은 캐릭터와 스토리를 평면적으로 보이게 하지만 동시에 안정감 있게 이야기를 끌어간다는 장점을 가진다. 주인공은 주어진 사건을 극복하면서 보호 받아야 할 존재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주체적인 캐릭터로 성장한다. 시원한 사이다나 스피디한 전개는 없지만 차근차근 떡밥을 회수해 가는 스토리가 결코 지루하지 않다.
[출처] 레진코믹스/마법사의 아이/산작약
대상을 편견 없는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 또한 이 작품의 특징이다. 마족이 등장하는 세계관 설정은 대부분 인간과 마족을 대비하여 마족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평화를 깨뜨리려는 부정적인 대상 또는 극복해야 할 적으로 그린다. 인간은 정당성을 부여받고 마족을 처단한다. <마법사의 아이>에 등장하는 마족은 일반적인 마족 코드를 따르지 않는다. 무자비한 마족도 있지만 어리바리한 마족도 있고, 따뜻한 마음도 가진 마족도 있다. 인간이 마족을 대하는 태도도 다르다. 트리샤가 팔레티온 인간 학교에 잠입하자마자 여러 사람에게 자신이 마족임을 들키지만 해일의 지인들은 차별 없는 시선으로 트리샤를 대한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레진코믹스는 다른 웹툰 플랫폼과는 달리 댓글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일반적인 웹툰 플랫폼에서 댓글 시스템은 작가와 독자 간의 소통 창구로 활용된다. 독자와 또 다른 독자 간에 의견 교환의 장이다. 댓글을 읽으며 다른 사람은 어떻게 웹툰을 감상했는지 참고하기도 한다. 댓글은 작가에게 긍정적인 영향과 동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레진코믹스는 작가가 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독자는 웹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댓글 시스템이 없다. 그래서 <마법사의 아이>에는 댓글이 없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리뷰도 거의 없으니 참고할 만한 정보가 없었다. 그동안 나 자신도 타인의 감상에 무의식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의견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감상에 집중했다. 생각해보면 웹툰을 읽을 때 자신의 감상이 가장 중요한데 말이다.
‘그림을 처음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런 선입견 없이, 이미 머릿속에 들어 있는 지식 없이 그저 내 눈으로, 내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일 게다. 평론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식은 온전한 작품감상의 장애가 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고 난 다음에 지식의 힘을 빌려 다시 보는 것이 가장 풍성한 감상방법이 될 것이다. 내가 본 느낌이 틀린 게 아닐까 싶은 두려움 따윌랑 접어두는 편이 나으리라.’ *
*츠베탕 토도로프, 『일상 예찬』 옮긴이의 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