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을 위한 체념 혹은 제의에의 중독, <통>
[출처] 투유드림/통/MEEN&백승훈
<통>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싸움을 잘하고 지도력 있는 주인공 이정우가 친구들과 함께 우여곡절을 겪으며 최고의 조폭이 된다. 단순하고 목적이 분명한 만화인만큼, <통>에게 기대할 수 있는 소구점 또한 단순하고 분명하다. 최고의 주먹을 휘두르는 주인공의 활약을 보는 것이다. 분명한 소구점만큼 <통>의 단점도 확실하다. <통>은 전형적인 방식으로 폭력을 미화하고 있어, 건전한 쾌감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통>은 어떤 면으로 보든 건전과는 거리가 먼 만화다. 그렇다고 특별한 통찰이나 교훈을 안겨 주지도 않는다. 앞서 밝힌 바처럼 <통>을 소비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주인공이 폭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에서 카타르시스를 얻기 위함이다. 이를 폭력 포르노로 비판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물론, 그 비판은 단순하고 손쉬운 만큼이나 얄팍한 담론만을 생산할 뿐이다.
그런데도 <통>을 소개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작가를 비롯하여 작품 전체의 태도 때문이다. <통>의 그 누구도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대신 이들은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을 거의 완전하게 체념한다. 대신 문제와 육체를 통해 부닥치며 수많은 폭력을 생산해 낸다. 문제에 대한 해결을 모색하는 대신 문제 자체를 소거하겠다는 태도는 <통>을 비롯한 ‘민백두 유니버스’ 전체의 태도이기도 하다.
[출처] 투유드림/통/MEEN&백승훈
예시를 위해 잠시 유니버스 내에서 <통>의 주인공 이정우와 대칭 관계에 있는 강혁의 경우를 살펴보자. <독고>에서 일진회의 방식으로 일진회를 분쇄한 주인공 강혁은 <블러드 레인>에서 경찰이 되어 조폭 간 전쟁을 유도한 뒤, 이들을 일망타진하려 한다. 물론, 이는 정상적인 해결책이 아닐뿐더러 최선의 해결책일 수도 없다. 이들은 그저 문제를 없애는 데에 집중할 뿐, 그 이후나 영향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이정우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민백두 유니버스’가 갖는 해결에 대한 체념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도출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마치 숱한 무협 장르에서 정파와 사파의 대결이 이어지는 원인과도 같다. 수많은 무협 장르에서 정파는 이미 오래 전에 권모술수와 각자도생으로 인해 대의와 명분을 잃은 지 오래이며, 사파보다 비열한 방법으로 그 명맥을 겨우겨우 이어나간다. 결국, 문제 자체를 삭제하고 세계관을 재편하는 것 외에는 갈등이 해소될 방법이 없다.
이처럼 ‘민백두 유니버스’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대담한 방법을 써야만 풀 수 있는 문제를 전제하고 있다. 민백두 유니버스의 인물들은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의 지배자의 지배자가 된다는 신탁이 얽혀 있던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칼로 3등분 내 버린 알렉산더 대왕처럼 폭력과 액션을 통해 문제 자체를 끊어 버린다. 다만 그것이 해결을 제공하진 않는다. ‘민백두 유니버스’의 인물들도 그 모든 것을 안다. 그 모든 것을 아는 인물들은 시시포스처럼 다시 폭력과 액션을 휘두른다.
문제가 생기고, 때리고, 쓰러지고, 복수하는 동안 <통>을 포함한 ‘민백두 유니버스’가 공들여 묘사하는 것은 파열하는 신체에 대한 페티시즘보다는 어지럽게 얽힌 네트워크를 몸으로 받아 내고 있는 구도자적인 엄숙함에 가깝다. 애초에 네트워크 밖을 상상하지 않았던, 혹은 상상할 수 없었던 인물들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폭력을 통해 무한히 재생산되는 문제들을 겪는 것이다.
[출처] 투유드림/통/MEEN&백승훈
문제의 원인을 알고 있되,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수용한 운명론자들의 폭력이란 제의에 가깝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사건의 그물들이 오직 구도자들이 펼치는 폭력의 숙연함을 위해 봉사한다. <통>에서 이정우는 그 제의에 중독된 인물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모습과 풍경은, 페미니즘이든 머스큘리즘이든, PC든 파시즘이든 오늘날 결코 낯선 모습이 아니다. 그것이 <통>을 언급한 두 번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