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속 여행> : 내가 믿는 걸 너도 믿는다면
[출처] 네이버 시리즈/지구 속 여행/쿠라조노 노리히코
너도 같잖아, 나와 같은 걸 믿고 꿈꾸잖아
지구 공동설(地球 空洞設, Hollow Earth).
지구의 내부는 뜨겁지 않고 속이 비어 있다는 이론이다. 근거가 희박한 믿음, 시류에 따른 믿음은 시대를 막론하고 발생하고 사라졌으며 움트고 자랐다. 만화 <지구 속 여행>은 사장된 이론 ‘지구 공동설’을 전제하여, 1864년에 쓰인 쥘 베른(Jules Verne)의 소설 『지구 속 여행(Voyage au centre de la Terre)』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출처] 네이버 시리즈/지구 속 여행/쿠라조노 노리히코
<지구 속 여행>은 괴팍한 광물학자 '리덴브로크 교수'와 이른 나이에 부모를 잃고 삼촌인 교수의 집에서 조수로서 지내며 학자의 소양을 쌓은 '악셀'의 여행기이다. 교수는 어느 책방에서 산 고서(필사본)에서 뜻 모를 암호문이 쓰인 양피지 한 장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이 아일랜드의 연금술사 '아르네 사크누셈'이 남긴 암호라는 것을 알게 되자, 리덴브로크 교수는 환희하고 악셀은 ‘기괴한’ 모험을 예감한다. 암호의 비밀이 밝혀짐과 동시에 리덴브로크 교수는 악셀과 함께 ‘여행 가방을 꾸’린다.
과거의 연금술사가 남긴 문구는 아래와 같았다.
“담대한 모험자여, 7월 1일이 되기 전에 스카르타리스의 그림자가 닿는 스네펠스 요쿨의 분화구로 내려가라. 그러면 지구의 중심에 도달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해 냈다.”
이후 리덴브로크 교수와 악셀, 그러니까 삼촌과 조카는 가이드 ‘한스’와 지구의 중심으로 떠났다. 그리고 분화구 속 동굴을 헤매다 결국 지구의 중심에 도달하여 새로운 발견을 거듭한다.
우리는 같은 걸 믿지 않아, 나는 보이는 것만 믿어
<지구 속 여행>은 환경이 주는 익숙함에 의문을 제기한다. ‘굉장한 것’은 주변의 인정과 관심으로 구성되기에 허구의 설정은 가치관의 전복으로 이어진다. 현대는 환경을 바꾸는 다양한 방법들이 즐비해 있다. 당장 몇 번의 클릭과 타이핑, 혹은 TV의 광고나 거리의 전광판은 타인을 쉽게 보여준다. 가깝고도 먼 타인의 삶이 주변을 장악하면 이는 곧 ‘나’의 환경이 된다. 환경은 공간의 성질을 함축하므로.
[출처] 네이버 시리즈/지구 속 여행/쿠라조노 노리히코
<지구 속 여행>의 악셀은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완전히 이 동굴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태양도, 별도, 달도, 나무도, 집도, 도시도... 지상의 인간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생각도 하지 않게 됐다. 우리는 말하자면 「화석의 시점」에서 세계를 보게 되었고 그런 굉장한 것들을 무익한 것으로 보고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화석의 시점은 원시의 관점을 은유한다. 현대의 기준에서 본다면 원시의 삶은 단순함 그 자체이다. 먹기 위해 일하고, 일하기 위해서 잠을 자며, 살아남기 위해 자손을 만들었다. 그러나 인류는 축적과 발전을 거듭하며 의미를 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태도는 당연하게도 환경(주변)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영향을 미친다. 태양과 별, 달, 나무는 자연물이다. 익숙하며 당연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집과 도시는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성장한 유산이다. 축적된 것이며, 주변을 개선하여 바꿀 수 없는 운명을 극복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반발의 욕망에서 비롯된 부산물이라 볼 수도 있을 테다.
어둠뿐인 동굴 속에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상을 탐구하는 학자에게 중요한 건 증명이었다. 이들에게는 동굴이라는 환경 자체가 도전이며 극복이다. 남태평양 뉴브리튼섬의 어느 부족은 ‘열심히 일하는 게 삶의 미덕’이라 여기며 살아간다고 한다. 노동 그 자체를 마음의 성장으로 정의하며, 그 성과 또한 마음가짐의 발현으로 봤던 것이다. <지구 속 여행>의 이들 역시 일에 진심을 담았고, 탐구라는 ‘일’을 숭상했다. 과정에서 의미를 구하고 끊임없이 나아갔다.
[출처] 네이버 시리즈/지구 속 여행/쿠라조노 노리히코
결국 상상력의 문제야
작품은 상상력의 극단에서 만개한다. 지구 공동설을 토대로 한 1864년의 소설을, 다시 만화의 형태로 바꾸는 것 또한 극단의 극단을 향한 탐구다. 방대한 서사를 압축하는 과정에서 소실된 개연성과 어색한 번역에 아쉬움이 남지만, 상상을 구체화하고자 했다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부정당한 지식의 극단, 극단을 향한 탐구를 섬세하게 그려낸 <지구 속 여행>은 믿음과 상상력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지켜야 할 곳은 어디이며 나아가야 할 곳은 또 어디인지. 애초 현실과 허구의 경계란 게 존재하는지, 그래서 얼마나 믿고 어디까지 상상해 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