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궁공략> : 플레이어는 가상현실의 꿈을 꾸는가?
[출처] 카카오웹툰/후궁공략/봉봉
이전에 최근의 K-웹툰·웹소설의 경향성을‘클리셰의 적극적인 차용과 전복’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만화규장각 웹진 <재혼황후> 리뷰). 그런 말도 했다. 설정에의 반전이 소재적인 차원을 넘어 타당한 의미를 확보할 때야말로 진정으로 가치를 갖게 될 것이라고. 다시 말해, 지금까지는 클리셰를 비틀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면, 이제는 그리하여 작품이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을 또한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해답을 제시하는 작품 중 하나가 바로 <후궁공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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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이유로 가상현실 게임 <후궁공략에> 갇힌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 이요나는, 게임 속 악역인 황귀비가 되어 원래라면 게임의 주인공이어야 했을 리리를 견제하고 황비의 자리에 올라야 한다. 이처럼 만화 <후궁공략>의 설정은 여러 겹의 클리셰로 촘촘하게 짜여 있다.
① 전개를 아는 주인공 : 이전 세대의 주인공과 달리 이들은 당황하지 않고 사건을 역으로 활용한다. 동시에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새로 바뀔 일들은 여전히 알지 못한다. 일명 시간여행의 패러독스다.
② 악역의 시점 : 대개 악역이란 신분이 고귀하거나 권력을 지녔으나 끝내 패배가 예정된 이들이다. 그러나 최근 등장한 작품들은 이들에게 주인공의 위치를 부여하여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③ 게임 시스템 : 퀘스트나 스탯, 아이템, 인벤토리와 같은 개념은 더는 생소한 것이 아니다. 주인공의 행동은 퀘스트에 따른 것이며, 보상으로 주어지는 스탯포인트와 아이템은 다음 전개에 활용된다.
이외에도 작중 배경으로 인공지능과 가상현실이라는 떠오르는 SF 소재를, 내적으로는 후궁암투물이라는 장르에서 흔히 등장하는 이벤트(사냥제, 입궁식)와 아이템(협죽도)을 활용하며 <후궁공략>은, 클리셰를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근래 새롭게 등장한 웹툰 및 웹소설의 정석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후궁공략>이 선사하는 것은, 단순히 감상자의 예측을 빗나가는 신선한 전개와 거기에서 오는 쾌감만이 아니다. 이들은 입장만 반전된 황비와 후궁, 주연과 조연, 선역과 악역의 이분법적인 구도를 탈피하고 제3의 지대를 지향한다.
[출처] 카카오웹툰/후궁공략/봉봉
우선, 게임에서 대립할 수밖에 없도록 설정된 리리와 황귀비가 있다. 리리와 황귀비가 모두 플레이어임이 밝혀지고 리리가 퀘스트를 진행할 수 없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경쟁에서 협력으로 전환된다. 이에 따라 리리의 플레이어 한상재는 황귀비를 플레이하는 이요나의 든든한 조력자가 된다.
이러한 관계성의 전환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폐황후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두 사람의 우정을 주축으로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풀어내면서 <후궁공략>은, 한상재의 말을 빌리자면, 후궁을 적대하는 황후라는 후궁암투물 클리셰의 안티테제로써 후궁암투물로서는 흔하지 않게 여성 간의 우정과 연대를 짚어낸다. 해당 에피소드에서 사건의 진실과 공주의 잔치가 겹쳐지는 연출 또한 일품이다.
주연이 아니더라도 덕비를 비롯한 다른 비들과 후궁들 또한 각자의 입장을 갖는 독립적인 존재들로 설정된다. 황제의 사랑을 갈망하여, 정쟁의 한복판에서 자식과 동생을 지키고자, 혹은 아름다운 연인들의 사랑은 만인의 보물이기에 이들은 저마다의 목표를 갖고 움직인다. 그리하여 이들은 더는 플레이어의 시련을 위해 마련된 도구가 아닌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따라 플레이어들과 반목하거나 협력할 가능성을 품은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면면들, 다시 말해 사람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여 독자적인 의사를 가지고 움직이는 이들의 특성은 곧 작품에서 묘사되는 게임 밖의 세계와 다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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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앞으로 돌아가, 최근 들어 등장한, 게임을 세계관으로 채택하는 다수 작품의 주인공들은 고민한다. 내 눈앞에 있는 이들 NPC는 과연 우리와 다른 존재인가? 결말에 이르러 그들은 NPC 또한 자신과 같은 감정을 가졌다는 결론을 내리지만, 우리 독자는 그러한 결론에 일부 공감하나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세계는 현실이며, 게임 속 세계는 허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궁공략>에는 현실과 가상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하되 절대적이지 않다.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인물은 한상재로, 한상재는 등장인물 누구보다 게임의 문법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다른 둘에게 작중 제시되는 가상현실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그러나 가상현실임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이요나나 서도하가 보이는 반응은 다르다. 자신과 서란희 사이에서 혼란을 겪던 이요나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로 마음먹고, 서도하는 자신의 의지로 현실 대신 영정의 삶을 택한다.
또한 이들의 선택은 결코 비합리적이지 않다. 이는 첫째로 3세대 가상현실 게임이 꼭 그러한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며, 동시에 요나의 아버지가 말했듯,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어온 현실 또한 현실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이 가상일 수도 있다는, 영화 <인셉션>에서와 같은 해석의 여지가 열리면서 두 세계 사이에 놓인 위계질서가 폐기된다. 그리하여 선택의 순간이 올 때 우리가 현실이라 믿어온 쪽을 택하는 것이 더는 당연한 일이 아니게 되며, 나아가 자신이 택한 세계는 곧 그의 진정한 현실이 된다. 그러한 이유로, 마지막에 요나가 내린 선택 또한 이상하지 않다.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축적되어 온 클리셰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에 기초한다. 이들은 현실과 가상, 선역과 악역, 아군과 적군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세계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의 웹툰과 웹소설은 이러한 세계관에 기반한 클리셰를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전복하였다. 그중 하나인 <후궁공략>은, 이들 클리셰가 기반으로 하는 세계관 자체를 부정하고 우리가 향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지를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