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픈 킬러> : 여러분, 밥은 먹고 다닙니까
[출처] 카카오웹툰/배고픈 킬러/엄세윤,복슬
화가 나면 파괴 충동이 든다. 신경질이 단단히 나 세상이 미워질 때면 눈에 밟히는 뭔가를 때려 부수고 싶기도 하고, 성질 돋우는 누구를 가만 안 두고 싶어지고, 심지어는 나 자신을 함부로 하게 된다. 끼니를 거르고 몸에 나쁜 것을 마구 먹고 싶어지는 것이다. 누군가를 가만 안 두는 것과 밥을 굶는 것은 아주 다른 듯해도 사실 비슷한 일이다. 결국은 무언가를 파괴하고 싶은 심정에서 비롯된, 살리는 것보다는 죽이는 것에 가까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피에 굶주린 킬러가 아니라, 정말 밥때 되면 배고픈 킬러의 이야기 <배고픈 킬러>(글 엄세윤/그림 복슬, 카카오웹툰)는 그래서 독특한 만화다. 공복과 킬러라니. 생존 본능과 살인 충동의 기묘한 조합이 수상하면서도 흥미를 끈다.
김킬러(가명)는 이웃집에 사는 소설가 정담에게 우연히 정체를 들키고 만다. 경계심 많은 킬러와 유쾌한 소설가인 두 사람이 공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성향이 반대인 데다가 절대 들키지 말아야 할 비밀까지 알게 됐으니 당연히 정담을 죽이러 찾아간다. 하지만 상극인 두 사람에게도 무시하기 힘든 공통점이 있었으니, 바로 두 사람 다 각별하게 먹성이 좋다는 것이었다. 사는 곳을 들키지 않기 위해 배달 음식을 자제하는 김킬러는 모든 것, 심지어는 치킨까지 집에서 해먹을 만큼 먹는 일에 진심을 다한다. 정담은 상대가 총구를 겨눈 와중에도 마감이 잘 된다며 환호하는 엉뚱한 소설가인데, 소설을 완성하는 일 외에 죽기 전 아쉬운 유일한 한 가지가 아직 써보지 못한 탕수육 쿠폰일 정도로 맛있는 음식을 좋아한다. 김킬러는 끝내 정담을 죽이지 못한다. 순수하게 음식을 향한 애정을 말하는 정담이 눈에 밟혀서, 그리고 정담이 자신과 같은 부먹파(탕수육 소스를 부어서 먹는 종족)이기 때문에.
[출처] 카카오웹툰/배고픈 킬러/엄세윤,복슬
어떤 면에서 <배고픈 킬러>는 블랙 코미디 같기도 하다.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악행을 고발하고 한 명 한 명 응징하는 과정을 그려서다. 많은 킬러물이 그렇듯 어째선지 김킬러는 멋지고 (상대적으로) 정의로우면서 인간적이기까지 해서 독자로 하여금 법치주의 국가인 것을 잊고 동조하게 만든다. 그가 총구를 겨눈 이들의 악행을 들여다보면 더욱 열심히 응원하게 된다. 사적인 이유에서 킬러 일을 하는 것뿐인데도 말이다. 표적이 되는 이들은 골목 상권을 박살 내고 남의 레시피를 무단으로 도용하고 정작 개발한 사람은 먹지도 않는 대충 만든 과자를 마케팅의 힘으로 팔아치우는 악덕한 식품 회사의 간부들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쌀 한 톨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만큼 후안무치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세상은 때때로 원치 않는 순간에 너무도 공평해서 그런 악인들에게도 허기는 찾아오고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시간이 허락된다. 그래서 김킬러는 다름 아닌 식사 시간에 그들을 처리한다. 맛있는 식사를 즐기는 때야말로 인간이 가장 방심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으면 평생 맛있는 것도 못 먹는다.” 그러니 “그걸로 복수의 의미는 충분”하다.
마치 끼니를 거르지 않는 것처럼 틈틈이 들어찬 개그들이 유쾌하다. 재미있는 유머일수록 요약 불가능하다는 것은 자명한 진실이니, 아직 못 본 사람이 있다면 직접 가서 감상해줬으면 좋겠다. 노련히 강약을 조절하며 서사를 전개하는 엄세윤 작가의 스토리와 맹한 듯 섬세한 복슬 작가의 그림이 보여주는 합 또한 좋다. 가끔 킬러물들이 흥행하는 것을 볼 때면 다들 내심 죽이고 싶은 사람들이 많구나 싶은데, 세상이 죽이게 미워질 때 이 말랑말랑 유쾌한 작품을 보면 웬만한 것은 전부 넘길 수 있을 것만 같다. 우리 모두 너무 심각해지지는 말자. 화를 낼 때 내더라도 밥은 먹고 내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선조들의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말자. 그런 직언의 말 하나 없는데도 선명한 메시지가 부드럽게 날아와 박힌다.
[출처] 카카오웹툰/배고픈 킬러/엄세윤,복슬
그러니 우리, 새해에도 끼니를 거르지 말자.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만큼 세상에 화가 날 때도 밥은 챙겨 먹자. 물론 유쾌한 만화도 잊지 말고 챙겨 읽자. "이 순간 살아있어서 다행인 맛"을 음미하며 먹고, 사는 일을 계속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