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기분> : 사진, 그리고 그리움
[출처] 삐약삐약북스/사진의 기분/이수희
우리는 상자에 무엇인가를 넣어 둔다. 그 무엇을 무슨 이유로 넣어 두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자그마한 상자 하나 즈음은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상자 안에 무엇인가를 놔둔다. 그렇다면 무엇을 넣어 두게 되는 것일까.
사연이 저마다 다르니 상자 안에 내용물도 모두 다르다. 무엇보다도 상자를 덮으면 내용물을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지금, 이곳의 쓸모와는 무관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지금 현재 필요 없는 이어폰일 수 있고 이미 유행이 한참 지난 작은 액세서리일 수도 있다.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는 유행가가 담긴 카세트테이프일수도 있고, 아직 잊지 못해 버리지 못하는 옛 애인과의 추억일 수도 있겠다.
이처럼 상자 안에 들어가 있는 내용물은 당신이 어떤 추억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삐약삐약북스에서 출간된 ‘지역의 사생활 99’ 시리즈 경주 편 이수희 작가의 『사진의 기분』(2022)은 이런 ‘추억’에 대해 다룬다. 그렇다면 이수희 작가는 어떤 추억에 대해 다루는가. 그것은 경주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보낸 유년의 추억이다. 상자 속에 숨어 있는 유년의 그때 그 사진들을 펼쳐 보면서 엄마의 아버지와 엄마에 대한 추억을 만화로 그린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은 ‘소원’과 관련이 있다. 말 그대로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대한 것이다. 어느 날 어린 수희는 펑펑 울었고 할아버지는 그런 손녀를 쳐다보면서, 계속 울면 엉덩이에 뿔이 난다고 장난친다. 이 말을 듣고 수희는 걱정에 휩싸인다. 아이의 입장에서 할아버지의 말은 거짓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곧 자신의 엉덩이에 커다란 뿔이 솟아날 것을 상상한 수희는 위협적일 만큼 걱정스럽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한다. 경주에 있는 첨성대에 찾아가 소원을 빌면 뿔이 사라질 수도 있다고 말해 준 것이다. 이런 서사는 살짝 난감하면서도 짠한 이야기인데, 이 장면은 당황해하는 어린 수희의 표정과 순수한 어린아이의 표정을 동시에 떠올리게 만든다. 그래서 독자는 미소 짓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소원’의 진실이다.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장난치며 ‘소원’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특별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출처] 삐약삐약북스/사진의 기분/이수희
이 대사를 곱씹어 보면 어린 수희가 부모님 곁에 있지 않고 경주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보낸 사연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젊은 수희의 부모님은 몸이 많이 아팠던 것으로 보이니 그렇다. 그러니 몸을 챙기기 위해 부모님에게 수희를 잠시 맡긴 것으로 읽힌다.
할머니와의 사연은 ‘언어’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뭔가 더 짠하다. 특정한 단어를 배우게 되는 과정에서 추억의 한 장면을 기억하고 있으니 그렇다. 어린 수희는 자신의 의도를 잘 맞춰 주지 않는 할머니가 밉다. 그래서 종종 “엄마의 엄마는 나를 싫어해!”라고 단정 짓는다. 그런데 어떻게 하겠는가. 어린 수희가 불편해도 할머니와 함께 지내야 하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냥저냥 호기심을 잔뜩 품은 채 경주를 바라본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감나무에 매달린 감을 수희에게 건넨다. 그때 할머니는 떫은 감을 주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어린 수희는 떫다는 맛과 “짜증나고 싫은 사람”한테 “니 떫다”처럼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수희가 배운 이 단어는 모국어가 아닌 ‘모어’ 차원에서 수희를 평생토록 쫓아다닐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치명적이다. 실제로 수희는 이 단어를 오래도록 잊지 못한다.
[출처] 삐약삐약북스/사진의 기분/이수희
귀엽고 어여쁜 어린 수희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잘 지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차차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경주에서 적응하기 시작한다. 때론 혼자 잠들기가 무서워 편히 주무시고 계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품속으로 스르륵 들어와 잠을 청하기도 한다. 꼬집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여운 캐릭터로 유년의 표정을 서술하고 있으니 유년이 더욱더 ‘유년’스러워지는 것은 이 만화의 장점이다. 따라서 이수희 작가의 귀여운 캐릭터들과 적재적소에 투영된 어린 화자의 빛나는 대화체는 그때 그 순간으로 우리를 이동시켜 준다. 타임머신을 타고 사진 속 그 시절로 돌아가 수희가 아닌 ‘나’를 추억하게 된다.
[출처] 삐약삐약북스/사진의 기분/이수희
이 만화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이다. 이 대사 이후, 수희는 ‘그리움’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마주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각자 사연이 있고 이 사연만큼 감추고 싶은 것도 모두 다르다. 만화가는 『사진의 기분』을 통해 그런 표정마저도 온전히 쳐다볼 수 있어야 한다고 위로한다. 숨기고 싶은 추억이나 그리운 정서에 힘들어하는 독자들에게 힘내라고 다독인다.
작가는 ‘나’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과 함께 더 방긋 웃어 보자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만화책이 손에 잡힐 정도로 짧아서 정말 편하게 읽을 수 있으니 독자분들도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