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데뷰> : 값싼 동정이 필요한 어떤 날의 나를 위하여
[출처] 네이버웹툰/랑데뷰/제로
값싼 동정이 궁해지는 날이 있다. 대개 내 성격에 자리한 결함을 마주한 날이다. 그럴 때면 나를 진심으로 아끼는 이의 진중한 조언은, 그 무게만큼이나 나의 결함 또한 중대하다고 말하는 것만 같아, 그것이 그의 애정의 무게임을 앎에도 애써 피하게 되고, 어쩌다 말할 데 없는 고민을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내어 버린 후에는, 설령 그것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감히 말을 얹지 않으려는 신중함이거나 가라앉은 분위기를 애써 환기하려는 노력이라 할지라도 불구하고, 나의 우울함이 가벼이 취급당한 데 분노하거나 서운함을 느끼며 스스로를 헐값에 팔아 버린 것을 자책한다. 그런 연유로 나를 모르고 또 사정을 모르는 이의 값싼 동정에 기대고 싶어지지만, 그런 날들에 안주해서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함을 또한 안다. 물론, 이 모든 게 어디까지나 머리로만.
<랑데뷰>는 제멋대로 엉망이고 채 다듬어지지 않은 다섯 주인공에 관한 만화다. 이들은 각각 다음과 같다. 사회성이 부족하고 자주 남들의 눈치를 보는 하민, 매사에 가볍고 끈기가 없는 봉팔, 어른스러운 듯 보이나 언제나 도망칠 곳을 마련하는 지은, 감정 기복이 있고 사람 보는 눈이 없는 민정, 그리고, 머리 말고 인간적인 장점 하나 없는 방구석 오타쿠 혜성(이는 민정의 소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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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랑데뷰>는, 이들을 향한 해명이나 비난도 없이 제 나름으로 개성 강한 이들의 하루하루를 있는 그대로 옮긴다. 그래서 꼭 <프렌즈>나 <빅뱅 이론> 같은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예로 <랑데뷰>의 시작을 알린 하민이를 보자. 때로 지나칠 정도로 생각이 많은 하민의 행동은, 물론 나름의 이유가 있었지만, 봉팔이 아니었더라도 누구라도 오해할 법한 것들이다. 예를 들어 상대가 보낸 메시지에 어떻게 답장할지 고민하다가 아예 답을 하지 않는다거나. 그렇지만 소연의 일로 소원해진 관계를 직시하고 이를 푸는 것 또한 하민이다. 다른 것도 있다. 하민은 계단에서 자신을 떠민 소연을 이해하려 하고 되레 소연의 동생 도윤을 걱정하지만 동시에 사회성 없는 자신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예쁘고 화려한 소연과의 친분을 뿌듯해하다가도 안줏거리 삼아 소연의 뒷담화를 하기도 한다.
이처럼 따스한 장면 뒤로 서늘함이, 서늘함 뒤로 따스함이 번갈아 치고 나오면서 어느 한쪽에도 무게를 두지 않는 것이 독자가 <랑데뷰>에서 위로를 구하면서도 끝내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출처] 네이버웹툰/랑데뷰/제로
한편, 이들의 얘기 속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가면 어쩐지 그리우면서도 익숙한 정경들이 펼쳐진다. 대부분의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랑데뷰>의 주인공들 또한 마냥 평화로운 학창 시절을 보내지는 않았다. 하민의 친구는, 하민이 소연에게 그랬듯 예쁘고 인기 많은 아이를 미워하면서도 한편으론 친해지고 싶어 자신이 한 뒷담화를 하민에게 뒤집어 씌웠고, 봉팔은 아버지의 외도와 부모님의 잦은 싸움으로 애정을 받지 못하면서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을지 몰라도 자신의 삶에서조차 겉돌며 일찍이 포기하는 법을 배운다. 공부를 포함해 일거수일투족을 통제받았던 지은의 모습 또한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 우리의 성격이란, 우리의 선택으로 이뤄졌으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의해서 또한 만들어지고 새겨진 것일 테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결함으로부터 도망치지는 않되 그것에게 잡아먹히지도 말자고, <랑데뷰>는 말하는 듯하다.
[출처] 네이버웹툰/랑데뷰/제로
물론 개성 강한 우리들이 모인다고 해서 상황이 항상 더 나아지리란 보장은 없다. 하민이와 봉팔이가 그러했고, 민정이와 혜성 또한 그럴 거고, 지은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때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쁘게 포장된 응원이나, 혹은 사려 깊고 예의 바른 무관심보다도 함께 모여 외로워하는 우리들의 랑데뷰(Rendezvous: 만남)일 수 있다고, 만화 <랑데뷰>는 우리에게 말한다. 앞으로 <랑데뷰>를 읽었거나 읽거나 읽게 될 독자들에게, 이들이 그런 장소가 될 수 있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랑데뷰> 독자들을 위해 조심스럽게 옮기는, 몇몇 작중 인상 깊었던 구절들.
"어쩌면 그 반복된 실패들은 무언가를 바로잡고 싶었던 간절한 시도의 의미 있는 모음이었을 것이다.”(7화 연애천재(4))
"그렇게 내가 나를 불쌍해하면 잠깐은 기분이 좋더라고. 울어서라도 나를 좋아하려고 노력하는 거야. 그 기분에 중독되면 안 돼요, 결국 본인을 망치고 마니까.”(44화 선택과 후회(1))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여보려고 서로를 찾았지만 가끔은 혼자일 때나 같이 있을 때 어느 쪽이 더 나은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종종 함께 외로워했기 때문이다.”(49화 불쾌한 인생(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