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탈출일지>, <듀선생의 인생제반연구소> : 나의 대학원 생존일지
시작부터 양해의 말씀을 드리자면 이번 리뷰는 다소 형편이 없을 수도 있는데, 그건 내가 종강을 못해 심신이 추슬러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대학원생이다.
내 글이 엉망인 것이 과연 대학원생이기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대충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대학원생이라 그래…”라고 덧붙이면 높은 확률로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자고로 대학원생이란, 대학원이라는 감옥에 갇혀 교수의 노예가 되어 기약 있(지만 없)는 형살이를 치르며 시들어가는 뭐 그런 존재… 같은 말이 슬픈 괴담처럼 여기저기서 자주 언급된다. 이 리뷰의 첫 문단을 읽고 당신의 마음이 조금 너그러워졌다면, 아마 당신 역시 대학원생에 관한 흉흉한 소문을 들은 것 아닐까.
[출처] 네이버웹툰/대학원 탈출일지/요다
<대학원 탈출일지>(요다, 네이버웹툰)는 소문 이상으로 애잔한 대학원생의 일상을 그려낸 작품이다. 귀여운 동물 캐릭터로 어떻게든 숨기려 해본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채도가 너무 낮아 음울한 분위기가 숨겨지지 않는다. 끝없는 프로젝트의 향연과 연구 실적에 대한 압박, 사제 간 혹은 선후배 간의 위계관계에서 오는 난감한 상황들이 인간의 존엄에 관해 엄숙하게 돌아보게 할 만큼 참혹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서 야근과 철야와 주말 근무를 거듭하고 회식에 MT까지 호출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만국의 대학원생이여 단결하라, 단결하라, 단결해 제발, 하는 구호가 목 끝까지 차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랩실에 소속돼 단체 생활이 기본이고 출퇴근과 회식 같은 말이 당연한 이공계의 이야기는 인문대(정확히는 문사철) 대학원생으로서는 거의 다른 세계의 일 같다. 흔히 퍼져 있는 ‘전생에 죄를 지은 대학원생’ 이미지는 이 이공계의 것에 가까운데, 문사철 대학원생의 삶은 꽤 다르다. 그 차이가 궁금한 사람은 <듀선생의 인생제반연구소>(듀선생, 디비피아)를 보면 된다. 혹시 문사철 대학원생 당사자라면 눈물을 닦을 손수건이나 아픔을 적어 내려갈 필기구도 준비하면 좋겠다. 엄청 웃긴데, 엄청 슬프기 때문이다.
듀선생은 “북극에서 온 듀공”으로 “북극의 얼음이 다 녹아 학령인구가 감소하는 바람에 북극대학이 폐교해서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교묘하게 현실적인 약력을 가진 만화 캐릭터다. 가상의 탈을 쓰고 있지만, 저자의 경험을 기반으로 그려진 생활툰 같다. ‘망망대해 연구계획서’, ‘내 글이 썩었다니’, ‘들썩들썩 엉덩이’ 등 제목만 봐도 그 번뇌와 피로가 전해져온다. 회식은커녕 밥 약속조차 드물어 고립되고 만다든지, 취업을 위한 학위가 아니어서 대학원을 탈출해도 깜깜하다든지, 많은 부분 <대학원 탈출일지>와는 사정이 다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차이는 <듀선생의 인생제반연구소>가 대학을 탈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기 위해서 분투하는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듀선생은 그저 읽고 쓰며 “세계에 대해 알기 위해 대학원에” 왔고, “별별 꼴을 다 봤지만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 선택”(‘대학원에 진학하자!’ 편)이라 말한다. 인생 제반을 연구하는 이런 식의 삶이 어쩔 도리 없이 좋은 거다. 그러나 지속하기가 쉽지 않다. 자학과 자만, 과로와 탈진을 롤러코스터 타듯 반복하는 원생 생활은 고될지언정 예측할 수는 있는 것이었으나 박사 수료 이후의 삶은 그마저도 어렵다. “끝없이 내려가기만 하는 것 같은 시간이 찾아온다.” 지원사업은 탈락하고 소논문은 매번 게재 불가, 난데없는 폐강은 생계를 위협한다. “언제 올라갈지 어디로 가야 할지 뾰족하게 아는 사람도 없다!”(‘일희일비 인생극장’ 편) 꿈을 좇아 진학한 푸릇한 학부 졸업생이 욕설을 염불 외우듯 흑화해 버리는 것이 놀랄 일도 아니다.
[출처] 디비피아/듀선생의 인생제반연구소/듀선생
“학기 중에 다람쥐같이 돈 모아” 방학 때까지 연명하는 듀선생처럼 한 철 벌어 두 철 사는 아슬아슬한 삶을 견디며, 불안과 우울과 분노나 고독을 돛대 삼아 나 역시 오늘도 헤맨다. 영영 갇힐까 봐 아득해지기도 했다가 내쫓길까 봐 처연해지는 것이 문사철 대학원생의 숙명적인 좌표인 걸까? 불안정한 생활이 계속되는 것이 끔찍하게 불안하지만, 동시에 읽고 쓰는 생활을 계속해 나갈 수 없을까 봐 두렵고 서러워지는 모순적이고 얼룩덜룩한 이 자리를 새삼 돌아본다.
사람들은 문사철 대학원생들에게도 속히 대학원을 탈출하라 응원하고(혹은 거길 뭐하러 갔냐 탓하고) 나 스스로도 일상이 고될 때면 이딴 곳 빨리 탈출하고 말겠다며 자조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주 나쁜 어느 날에도 한 가지 사실만은 기억하려 한다. 이것이 내가 선택한 길이라는 사실을. 원하는 것을 선택했으니 어떤 고통도 감내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선택한 운명을 너무 미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무언가를 좀 더 해 나가고 싶었던 그 소박한 바람을, 그 바람을 따라 여기까지 온 나를 지금도, 앞으로도 미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글을 닫아야 하는데 허겁지겁 글을 쓰고 나니 이거 또 탄소 배출량에나 기여한 것은 아닌가 자괴감이 밀려온다. 이공계와 문사철 대학원생을 이토록 이분해서 말하다니, 문사철생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해 버렸다는 생각도 든다. 온갖 번뇌가 밀려오는 와중에, 이럴 때야말로 듀선생의 말씀을 기억할 때다. “계속 평가 받다 보면 자학하기 쉽다.”, “일 많고 돈 없고 팍팍할수록 서로에게 다정하게 해 주자!”(‘내 글이 썩었다니’ 편) 아무튼간에 웃자고 시작해 갑자기 감성적으로 끝나 버리는 이 대책 없는 리뷰를 이해해 달라. 대학원생이라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