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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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 같은 것들을 걷어낸 뒤에 보이는 진짜 목적은

난임 부부의 이야기가 담긴 "내일은 또 다른 날"

2023-05-19 이복한솔


산과 바다는 임신과 출산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난임 판정을 받는다. 바다는 가능한 모든 것을 시도한다. 몸과 식단을 관리하고, 난자를 채취하기에 앞서 주사를 여러 번 맞고, 시험관 시술을 받는다. 그 외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방법도 써본다. 마음은 간절한지만 안타깝게도 자꾸 좌절하고 만다. 실패 자체도 고통스럽지만, 이 과정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그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산과 바다에게 자녀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불쑥 꺼내곤 한다. 부부가 지금 그걸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이 무엇인지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출산을 생애 주기, 혹은 당연히 이뤄야 하는 성과라고 상정한다. 노부모는 물론이고 일부 친구나 지인들도 마찬가지다. 먼저 임신에 성공한 사람들이 특히 더 그런 듯하다. 바다의 부모와 산의 부모는 딸이 시부모에게 이쁨을 받기 위해, 자기 과시를 위해, 은퇴 이후 외롭거나 고되지 않은 노후를 위해,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 손주가 필요하다며 출산이 필요한 구체적인 이유를 덧붙이기도 한다. 생기지도 않은 아기를 인격체가 아니라 인적 자원으로 간주하고 있기에 가능한 설명이다. 이런 와중에 당사자인 산과 바다조차 출산을 원하는 까닭을 서로 의논하지 않는다. (적어도 작중에서는 그렇다) 독자는 작가가 이야기 곳곳에 배치한 실마리를 차근차근 짚어가며 읽을 수 있지만, 이 문제를 직접 겪으면서 홀로 고민하는 바다에게는 퍽 쓸쓸한 일이다.



바다의 바람은 가족 구성원을 늘리고 함께 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기회가 될 때마다 출산 이외 다른 방법도 선택할 수 있다는 의중을 얼핏 내비친다. 주인이 없는 개를 입양하겠다든가, 임신 중단을 계획하고 있는 친구에게 무심코 “야, 그 아기 낳아서 나 주라.”고 말하는 식이다. 출산은 여러 가지 수단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바다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이 방법만 인정하는 것 같다. 대안을 고려할 만한 여지를 주지 않는다. 세상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 억지로 애를 쓰는 탓에 산과 바다는 힘겹다. 이러한 부침은 바다가 그림 작가로서 겪고 있는 부침과 겹쳐 보인다.



“그림을 수정해달라고 출판사 편집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좋아서 시작한 그림인데 회의가 든다. 다른 사람의 글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 재미가 없다. 베스트셀러를 여러 권 낸 편집자가 말했다. 내가 쓰고 싶은 책을 쓰지 말고 독자가 읽고 싶은 것을 쓰라고. 나는 언제쯤 쓰고 싶은 것을 쓰고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릴 수 있을까?“


임신 시도와 난임 시술 자체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임신 가능성이 낮은 신체 조건을 바꾸는 과정은 어렵다. 생식 기관에 직접 가하는 조치는 바람을 두렵게 한다. 바다는 배란 테스트기를 구매할 때 “일부러 우리 동네에서 좀 떨어진, 다시 갈 일 없는 약국을” 고를 정도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다. 의료진 여러 사람에게 노출된 상태로 산부인과 검사를 받을 때 “최소한의 양해나 동의도 없”었던 상황에서 인턴까지 들어오는 바람에 당황하고 불쾌감을 느낀다. 시험관 시술을 받을 땐 어릴 적 국민학교에서 해부했던 개구리와 자신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지만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련의 과정이 힘든 것은 응당 필요했던 사전 준비와 기반이 부족한 탓이다. 성생활-임신-출산, 육아와 삶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건강한 일상 대화. 검사와 시술 과정에 대한 의료진과 환자의 충분한 소통. 더 나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교육과 기반……. 그 대신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은 임신과 성을 운운하면서 자신을 과시하는 산이의 친구들, 임신 실패를 며느리 탓으로 돌리는 산이의 친모, 불안해하는 환자를 앞에 두고 업무와 전혀 관련 없는 잡담을 나누는 의료진이다.

《내일은 또 다른 날》은 손에 잡힐 듯 뚜렷한 해법을 보여주거나 독자가 대리 만족을 느낄 만한 장면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나 르포가 아니다. 평범한 대화와 지면을 꽉 채우는 그림을 통해서 인물이 경험하는 답답한 현실을 확실하게 전달할 뿐이다. 산과 바다가 겪은 일에 공감하는 독자라면 기회가 있을 때 한 마디라도 발화하고 논의에 참여하겠다는 모종의 의지를 얻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산이나 바다와 비슷한 입장에 처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다고 미리 마음을 굳게 먹을 수도 있겠다.


다수의 국제만화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그래픽노블 작가로 자리매김한 김금숙의 신작. 간절한 마음으로 아이를 바라지만 난임으로 고통받는 부부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가 그려낸 생생한 인물들은 난임 부부의 고심과 분투에 공감하게 하고, ‘출산’에 대한 우리 사회의 통념과 태도를 돌아보게 한다. 주인공 부부가 대표하는 난임 부부의 곤란은 작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미래가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흑백의 먹으로 그림을 그려온 작가는 화사한 색감의 수채화로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마무리하며 주인공 난임 부부의 평화로운 삶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