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하고 도전하기
내일은 비가 그칠 거라는 예보를 확인한 저녁, 『그 길로 갈 바엔』을 집어 들었다. 막장에서 던지는 출사표 같은, 절박하고 도전적인 제목이라 생각했다. 근래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침울하다가 들뜨거나 했는데, 그 변화에 일일이 대응하자니 생활에 무리가 있었다. 일상이 되어 버린 기복을 다스리는 건 어려웠지만, 무슨 말을 하든 앞에 ‘그럼에도~’와 ‘그럴 바엔~’을 붙이니 간단히 평온해졌다. 일정 수준의 체념은 마음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았다. 와중에 수용과 도전, 생활과 일탈이 동전의 양면처럼 가까이 붙어 있음도 알게 되었다.
안 하던 짓 하기
『그 길로 갈 바엔』은 '일탈'과 '땡땡이'를 주제로 한 작가 5명의 단편 만화집이었다.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재활용 작가)은 남매와 자매, 총 4명의 학생이 얽혀서 못난 손윗사람들의 연애와 이별을 챙기는 동생들의 수난을 담았다. 오빠와 언니의 대리 이별을 진행하는 난감함을 가볍지만 우습지 않게 그려냈다. <명왕성의 기억>(약국 작가)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도망친 첫째 딸의 하소연을 허심탄회하게 들려준다. 이에 가족사의 비극에서 터져 나온 울분이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데, 주인공 특유의 개그감으로 비극조차 호탕하게 와닿았다. <토하시는 대로>(서글 작가)는 질문을 들으면 신탁으로 기이한 것을 토하는 능력을 가진 언니가 내세운다. 그 옆에는 특별한 언니를 보좌하는 여동생이 있다. 질투와 연민, 갈망이 뒤섞인 모호한 이들의 관계성은 가출을 통해 극단으로 치닫는다. 특별한 능력과 모호한 관계성이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언제나 인생의 밝은 면을 보세요>(각종모에화)의 경우, 우울과 희망과 꿈처럼 추상적인 개념을 의인화한 초현실적인 서사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지극히 현실적이라서, 마냥 먼 타인의 삶처럼 여길 수 없도록 하였다. 마지막 단편 <추억의 왕>(하양지)은 때 이른 퇴근을 하는 직장인의 산책 길을 함께 하도록 한다. 일부러 낯선 길로 돌아가 마주하는 풍경과 직장인의 상념에서 일탈의 방법론이 엿보였다.
단편의 의미와 가치는 기민하게 포착한 찰나에서 드러난다. 점과 점이 이어져 선이 되는 순간만으로 단편이 완성된다. 『그 길로 갈 바엔』은 일탈의 순간에 초점을 둔다. 일련의 사연을 가진 이가 새로운 계기를 만나 달라지기 시작하는 서사는 도입부의 클리셰이지만, 이를 본론과 결론으로 끌고 온다면 성장의 과정보다 변화 그 자체에 주목하게 된다.
성장의 결승점인 동시에 출발점
어제와 오늘은 같을 수 없다. 날씨나 인사말, 식사 메뉴와 같이 사소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생긴다. 어제만 못한 오늘, 어제보다 좋았던 오늘이라는 평가는 비교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잘한 것과 못한 것, 나은 것, 조금 더 나은 것 등은 모두 평가를 위한 분류이다. 그러나 기준이란 상대적이다. 법과 윤리가 부재한 자연에서조차 절대적 기준을 통과한 하나의 개체만 살아남는 게 아니다. 다양한 기준 아래 적응하고 변화한 여러 개체들이 모여 새로운 생태계를 구성한다. 인류의 경우, 그 길로 갈 바엔 다른 길로 향하겠다는 다짐들이 쌓여 문명을 이루었고, 그 길로 갈 바엔 어디로도 향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인식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 길로 갈 바엔』의 등장인물들은 일상적이지 않는 방식으로 상황을 바꿔보고자 애쓰거나, 새로운 역할을 쟁취했다. 혹은 받아들이고 감내하거나 스스로 뿌듯함을 발굴했다. 이들에게 일탈은 성장의 결승점인 동시에 출발점이 된다. 벗어났으므로 새로움을 찾을 수 있었지만, 새로움을 만났기에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궂은날은 벌써 저만치 멀어졌다. 내일은 하루 종일 맑을 것이다.
|
단편만화라는 눈부신 상상력, 흑백만화라는 다채로운 세계. 지루함은 금물, 지름길은 통과!
젊은 만화가 테마단편집, 두 번째 이야기.
『여자력女自力』으로 첫번째 단행본을 선보였던 젊은 만화가 테마단편집 시리즈의 두번째 이야기가 돌아왔다.
두번째 단행본의 주제는 ‘일탈’과 ‘땡땡이’. 가보지 않은 길로 내딛는 한 걸음, 작은 세계와 일상을 벗어나는 한 걸음들이 모여 도착한 곳은 어디일까?
쉬운 길도 헤매는 세상 속에서 늘 가던 뻔하고, 쉽고, 빠른 ‘그 길’로 가지 않은 다섯 주인공들.
경쾌하고 대담한 발걸음으로 조금은 돌아가기를 택한 그들의 유쾌하고 신비로운 여정을 따라가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