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린 듯이 보게 되는 작품이 있다. 무심코 시작했다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보게 되는 작품, 내 손가락이 무언가에 지배당하는 것처럼 ‘다음 화 유료 결제’ 버튼을 누르게 되는 작품 말이다. 읽다 보면 시간은 훌쩍 흘러 있고,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 새 마지막 화를 감상하고 있는 마성의 작품! 오늘 소개 할 이하진 작가의 ‘도박중독자의 가족’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작가가 ‘도박중독자의 가족’으로서 경험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도박에 중독된 가족은 바로 작가의 시동생이다. 작가는 가족 한 명의 도박중독으로 인하여 남은 가족들의 삶이 어떻게 망가져 가는지를 실감나게 묘사한다. 특히 시어머니와 작가 본인은 도박중독자의 가족으로서 ‘공동의존증(1)’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묘사 또한 생생하다.
사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도박’은 진짜 도박이 아니라 주식이다. 주식이 어떻게 도박이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작품을 감상하다보면 그러한 의문은 말끔히 사라진다. 주식 중독인 시동생의 모습이 영락없는 도박중독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화 ‘타짜’에 나오는 것 같은 진짜 도박을 소재로 했다면 이 정도로 몰입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카지노나 하우스(불법 도박장)에서 하는 본격적인 노름은 나와 상관없는 세상이라고 생각 되어 거리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주식은 남 일 같지가 있다. 주변에 하는 사람도 많을뿐더러 주식에 잘못 투자해서 큰돈을 잃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주식을 하는 내 가족도 겪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든다고 할까?
[ 그림1 주식으로도 도박중독이 될 수 있다. 선물을 한 셋째(시동생)도 쌍문동의 자랑 성기훈처럼 오징어게임에 참여해야 할 판이다 ]
이렇게 나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 때부터 느끼는 몰입감은 상당히 크다. 예를 들어 ‘홍인혜’ 작가가 전세사기를 당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루나의 전세역전’이라는 작품도 그렇다. 사실 홍인혜 작가는 2006년부터 10년이 넘게 생활툰을 그려온 생활 웹툰계의 고인물(2)이다. 네이버웹툰이나 카카오페이지 같은 포털 기반의 웹툰 플랫폼이 활성화 되지도 않았을 때부터 ‘루나파크’라는 본인의 홈페이지에 만화를 꾸준히 올려 왔고, 이는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긴 시간 연재한 루나파크보다 훨씬 더 주목을 받은 것은 ‘루나의 전세역전’이라는 비교적 짧은 만화이다. 홍인혜 작가는 이 만화 덕분에 ‘유퀴즈’라는 TV 프로그램에도 출연하였다. 이렇듯 운이 나쁘면 나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은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끌어올려준다.
또한 이 만화는 답답한 상황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명 ‘고구마식 전개’가 주를 이룬다. 이를테면 작가의 남편은 장남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집안의 채무를 모두 감당하도록 강요받는다. 시동생의 도박중독을 가장 먼저 인지한 작가는 홀로 도박중독 상담소를 다니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며느리’라는 가족 내 낮은 서열 때문에 좌절감만 느낄 뿐이다. 시어머니의 맹목적이고 비뚤어진 자식 사랑은 시동생의 도박중독을 더욱 부추기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작가의 가족이 감당한다. 경악스럽게도 비난의 화살은 도박중독자인 시동생이 아니라 그 도박빚을 떠맡아 주지 않은 작가의 가족에게로 향한다.
읽다보면 고구마를 백 개 쯤 먹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고구마식 전개가 흡입력을 더 높여준다는 점이다. 독자는 이 만화를 보는 내내 시동생이 또 어떤 사고를 칠지 불안하고, 이러한 불안은 적절한 서스펜스를 유지하게 해 준다. 그리고 고구마식 전개 또한 독자를 이 작품에 잡아두는 역할을 하게 된다. 고구마를 먹은 독자는 결국 언젠가는 등장할 사이다(3)를 오매불망 기다리며 작품을 떠나지 못하기 마련이니까.
[ 그림2 이 작품의 주요 빌런인 셋째(시동생)와 시어머니. 사이다를 기다리는 독자는 빌런이 주는 고구마를 기꺼이 감내한다 ]
본 리뷰에서는 주로 작품의 자극적인 서사에 기반을 둔 흡입력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사실 이 작품이 흥밋거리 위주의 가벼운 작품은 아니다. 도박중독자의 가족이 겪는 심리를 작가의 어릴 적 트라우마와 연결해 섬세하게 묘사하였으며, 상담 과정에서 알게 된 공동의존증 같은 관련 지식 또한 잘 설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이 작품의 매력을 단 한 개 고르라면 단연 흡입력을 꼽겠다. 중독자인 시동생은 물론이요, 그 시동생을 무조건적으로 감싸는 시어머니의 행태를 보고 있자면 정말이지 나까지 속이 터져 공동의존증을 경험할 판이라니까.
< 참고자료 및 자료출처 >
(1) 공동의존증(codependency) : 중독으로 인한 감정적 고통과 스트레스 등으로부터 가족 구성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적응하는 행동(출처 : 국립부곡병원)
(2) 고인물 :'고인 물은 썩는다'라는 격언에서 나온 인터넷 유행어로서 종종 한 분야에서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도 쓰인다.
(3) 사이다 : 고구마식 전개를 속 시원히 해소해 줄 요소를 비유적으로 일컫는 유행어
|
평범하게 오손도손 살고 있던 가족들은 난생처음 '도박중독'이란 병에 맞닥뜨린다.
자신의 병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중독자와 그를 가족으로 끝까지 믿고 싶었던 가족들의 삶은 결국 산산이 부서져버리고 만다.
그 안에서 혈연이 아닌 가족으로 그들의 삶을 지켜보며 함께 싸웠던 여성의 기록을 그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