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1, 문지현 작가의 SF 작품 '꿈의 기업' ]
출판만화 중에는 십여 년 넘게 장기연재를 진행하는 게 많지만, 웹툰은 그렇지 않다. 초기 매체의 특성상 기술로나 트렌드로나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별개의 작품들에서 장기 연재를 기대하기란 힘들다. 이말년이나 조석이 1세대 웹툰 작가로 분류되는 상황은 웹툰의 역사 15년 남짓에서 ‘원로’ 웹툰작가라는 표현을 성립케 한다. 이들 1세대 작가가 연재를 제안받던 방법이나 고료, 수익분배나 독자층의 소비방식 등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연재하던 플랫폼이 사라지기도 하고, 연재가 장기화되면서 더는 인기를 얻기 힘든 장르가 있기도 했다. 여튼 간에 이런 이유로 웹툰은 장기연재가 힘들다.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정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문지현 작가의 <꿈의 기업>은 연재 7년 차에 접어든 장기연재 웹툰이다. 2016년 11월에 출발한 이 작품은 이제 막 작품의 후반부에 들어섰다. 작가 스스로도 소수의 팬과 함께한다고 말했던 이 작품은 만약 네이버가 아니었다면 장기연재가 힘들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작품의 도입부에 제시되었던 로그라인은 이후 5년여간 느릿하게, 여러 설정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제시되었다. 작가는 동시대의 몇몇 화두를 가져오면서 이를 토대로 처음 제시되었던 로그라인에 합류시킨다. 좋게 보면 무엇보다 ‘연재’라는 단어에 어울리지만, 반대로 보면 이야기 자체로는 실황이 업데이트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그 이유로는 첫 번째, 이 작품은 꿈의 기업에 들어가 계약을 맺고 감금생활 중인 직원들이 기업에 대한 비밀을 파헤친다. 즉, ‘바깥’을 탐사하는 이 이야기는 감금상황이라는 점에서 볼 수 있는 게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 독자는 작품에 주어지는 정보로만 이야기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데, 이 작품은 웹툰 속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바깥’ 삼아 그곳의 정보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 그림 2, 22년 12월 25일 1화를 공개하며 6부 연재 시작을 알렸다 ]
이 점에서 이 작품은 웹툰이라는 형식을 하나의 현실로 제시하고자 하는 것 같다. 우리가 티브이 뉴스에서 세상을 알 듯, 이 웹툰을 보면 우리 현실을 내다보는 듯한 인상이 있다. 가령 작품 속의 인물이 웹툰 밖의 독자를 향해 던지는 몇몇 메타픽션적 대사도 그렇고 말이다. 중요한 건 이러한 감금의 형식이 되려 바깥을 내다보는 관측 지점이 된다는 점이다. 통일 전망대 같은 곳에서 망원경이 있던 걸 떠올려보자. 이 전망대는 북한으로 갈 수 없지만 북한을 들여다보는 창구가 되어준다. 마찬가지로 웹툰 속의 감금 상황을 통해 ‘바깥’ 세계를 들여다보는 형식을 취하는 이 작품은, 반대로 바깥으로서의 우리 현실을 관측하는 지점이 되어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작품은 작품 자체로만 바라보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첫 번째, 현실을 들여다보는 일을 굳이 웹툰에서 할 이유가 없다. 예술 형식으로써 웹툰은 현실 비판이 가능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을 때 그런 현실은 ‘성장하지 않는’ 상태일 뿐이다. 즉, 비판이라는 것은 앞으로 나아감을 전제하는데 전혀 성장하지 않는다면 그 비판은 실효성이 없다. 두 번째, 계속해서 동시대 화두를 가져오려는 시도가 내러티브에 영향을 끼칠 때, 이는 특정한 내러티브에 기반해야 할 작품이 전혀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동시대성이란 실시간이고, 실시간이라 함은 특정한 기반이 없다는 뜻이므로 내러티브의 안정성을 해친다. 이 작품의 경우, 첫 번째를 통해 고정점을 획득했지만 두 번째를 통해 미끄러지고 있다. 어딘가를 바라보기에는 안정적이지만, 정작 자신은 현실에 미끄러지면서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인상이 있다.
이러한 안정성은 장기연재의 토대가 되어주었다. 혹은, 꾸준하다고 할 만하다. 장기연재를 계속하면서도 페이스를 유지하는 걸 보면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장기연재는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기보다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끊임없이 밀려 들어옴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미끄러지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런 점이 작품 전체에 대한 비판점이 되는가. 이 부분은 작품의 장점이자 단점이 된다. 이야기의 종장에 접어든 6부 시점에서 이러한 미끄러짐의 서사는 의도치 않게 그림 인공지능이나 ChatGPT와 같은 AI의 기술과 공명하게 됐다. 이른바, ‘의도치 않게’ 이루어진 이 공명은 미끄러짐의 서사가 자아내는 동시대성을 언급하게 한다. 봉준호 영화의 삑사리처럼 이 작품에는 바깥의 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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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을 지배하는 거대기업과 거대기업을 움직이는 인공지능. 그 인공지능이 꿈을 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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