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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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라는 이름", 마영신 작가의 <아티스트>

욕망을 지닌 세 ‘아티스트’들의 이야기

2023-08-23 이선인


마영신은 어느덧 대단한 작가가 되었다. 그는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솜씨좋게 풀어낸 <엄마들>로 2021년 하비상의 ‘최고의 국제 만화’ 부문을 수상했다. 서구의 평단이 이 만화의 어느 부분을 그렇게 호평했을까를 알기는 어렵겠으나, 마영신이 현실의 풍광들로부터 정확한 하나의 상(image)를 끌어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에는 서로 동의가 가능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영신은 권용득, 송아람, 김수박 등의 사실주의 스토리텔러 처럼 읽힐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서 다음 웹툰(현 카카오 웹툰)에 연재되었던 <아티스트>도 그러한 사실주의로 읽히기 쉬운 작품이다. 실제로 댓글 중에는 ‘어떻게 이렇게 예술과(科) 사람의 행동을 정확하게 그리시는가, 혹시 나의 집에 CCTV를 달아놨는가’하는 너스레가 전시되곤 할 정도이니, 마영신이 예술인이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된 인간 군상의 추잡함과 허레를 매우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는 것은 어느 정도 공통된 평가일 것이다. 이 만화는 세 주인공이 가진 근본적인 삐뚤어짐, 질투의식 따위를 묘사하며 시작한다. 혹자들은 이렇게 표출되는 그들의 불편한 성품이 바로 만화의 제목인 ‘아티스트’와 연결되는 지점일 것이라 기대할 수도 있다. 물론, 마영신은 이러한 기대를 정확히 비껴나간다.


사실 <엄마들>을 보는 독자들 역시 일견 우리 세대의 ‘엄마들’을 있는 그대로 다루었다는 점에 포커스를 맞출 확률이 농후하다. 하지만 <엄마들>의 미덕이 그러한 관찰의 결과에 있다고만은 하기 어렵다. <엄마들>에게 어떠한 위대함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전형성의 표층과 실재의 심층이 정확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부분일 것이다. 말하자면 그가 그리는 ‘엄마’들은 우리의 기대를 위배하는 철저히 욕망적인 존재이지만 그런 한편 그들을 우리의 인식(=모성애의 표출자) 바깥에 있는 괴물로 그려내지도 않는다. 마영신이 그린 엄마들은 한두개의 카테고리 내부에 넣을 수 없는 매우 복합적인 존재이며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잃어버렸던 ‘엄마’라는 표상의 진위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마영신은 매우 ‘정확하게 그리는 작가일 뿐 아니라 우리가 미처 직시하지 못하는 본질까지 복원하려는 의지를 지닌 작가다. 그는 결코 단순한 희화나 정확한 묘사라는 미명하에 만들어지는 편향성 따위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티스트>는 어떠한 목적의 결과물인가. 마영신의 작법은 어떤 면에선 신화적이기도 하다. 그는 욕망을 지닌 세 ‘아티스트’에게 동일한 시련을 부과한 뒤, 그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지키는 지 알아보려고 한다. 재미있게도 그가 내리는 시련은 다름 아닌 물질적 성공이다.


만화는 한 때 남성 예술인들의 모임이었던 ‘오락실’에 남은 유일한 세 남자 신득녕, 김경수, 천종섭의 일화를 그리며 시작된다. 이들은 한 때에 자신들과 같은 ‘오락실’에 있었지만 지금은 성공해서 모임으로부터 모습을 감춘 자들에 대한 말들로 작품의 포문을 연다. 이 때에 이 ‘성공’은 무엇으로 규정하는가? 마영신은 어쩌면 이 질문으로부터 출발했을 수 있다. 그러니까 ‘묘사의 대상이 모두 예술가’라는 작품의 특징이 애초부터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유발되었을 수 있다는 의미다. 대다수의 인간들에게 있어 성공은 정확히 물질 세계에서의 성공과 연계된다. 하지만 때때로 사람들로부터 그러한 표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벗어나길 기대하는 대상들이 있다. 그들은 성인, 종교인 혹은 예술적 순수성을 추구하는 순수한 예술가로 좁혀진다. 따라서 <아티스트>의 목표는 우리 시대의 예술가들이 가진 전형적 표상을 훔쳐내는 것 따위가 아니라, 오히려 물질 세계의-그러니까 돈과 권력 따위로 정리되는- 성공이 작동하는 양태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때문에 마영신은 이 세 사람의 성공의 루트와 형식, 그에 따른 리액션의 결과를 매우 자세히 그리려고 노력한다. 작품은 꽤나 꼼꼼하게 이들 성공의 성격을 분리해서 표현하는데, 이를테면 김경수는 계급 상승의 지향, 천종섭은 갑작스러운 자산의 증가, 신득녕은 목표지향적 성과의 도출으로 그려진다. 마영신은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혹은 몰락하는가를 지켜보는 데 더 관심을 두고 있는 셈이다. 또한 이 모든 성공의 찬탈이 정확히 어떻게 권력을 생산하는지, 그리고 그 생성된 권력으로부터 이들이 어떻게 버티어내는지를 그려내려고 한다.


이런 목표는 때때로 정확한 언어로 표출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출판사 ‘오락실’의 성공 이후 잡지의 운영 방식에 클레임을 받은 득녕은 ‘지금 과연 권력은 어디로 옮겨갔는가’를 자문한다. 성공이라는 결과가 근본적으로 권력과 결부된다는 사실을 짚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잡지의 수익을 1/n로 나누겠다’고 선언한 득녕이야 말로 스스로 반권력적 시스템 구축을 천명했던 자라는 점이 특기할만하다. 득녕은 자본주의적 목표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성공을 달성한 존재이며, 따라서 그가 획득한 권력은 자의적 유발이 아닌 과정의 결과로 규정된다. 득녕의 성공을 통해 물질 세계의 성공과 권력의 단단한 결속이 드러나는 셈이다.


이런 과정이 바로 마영신이 바라보는 세계의 형태이다. 마영신이 지금 주장하는 것, 그것은 권력이란 생성되는 것이며, 그렇게 생성된 권력은 그 생성자의 도덕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권력이란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푸코의 논의와 연결된다. 하지만 이렇게 권력 유발자의 도덕성을 문제로부터 제거할 때, 말하자면 시스템을 통해 생산된 권력으로부터 부도덕이 생성된다는 전제를 받아들였을 때, 도덕성의 문제는 오히려 개인의 선택이라는 차원으로 축소되어버린다. 말하자면 권력을 통해 생성된 부도덕을 체화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개인적 선택의 문제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아티스트>는 그러한 세계에서 상이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왜 득녕이 다른 두 사람과 다른지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다. 그렇다. 왜 득녕은 다른 두 사람과 달리 권력에 잡아먹히기 보다는 그로부터 계속 빠져나오려 노력하는가?


이 만화에는 어딘가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한 에피소드가 있다. 공모전에서 탈락한 득녕은 간만에 자신의 은사를 찾아간다. 이 선생님은 오랜만에 만난 득녕을 보고 커피를 마시자 말하고는 한참 거리를 거닌다. 그리고는 동네의 각종 가게에 들락날락 거리며 커피나 술을 얻어마시는 등 알 수 없는 행동을 한다. 이후 선생님의 서재에 돌아온 득녕은 ‘새 책은 내지 않으실 거냐’고 묻고, 선생님은 ‘다 늙어서 내면 뭐하나. 나무만 죽지.’라는 선문답 같은 대답을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지금 쓰는 모든 글은 그저 스스로가 보고 싶어서 쓰는 것 뿐이라 말하고 대화는 종료된다.


무엇보다 신경쓰이는 부분은, 선생님이 여기저기서 무언가 얻어먹는 과정을 매우 세밀하게 내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에피소드 전체가 득녕의 시선과 결부되어 있음을 감안하자면 이는 득녕의 관심을 드러내는 광경이다. 그리고 이런 득녕의 호기심어린 시선은 작품을 보는 우리에게로 전이된다. 마영신은 지금 이런 질문을 던진다. 득녕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이런 만남이 끝난 뒤 득녕이 수상을 거부할까 고민했다는 점을 떠올리자. 득녕이 적극적으로 성공(=권력화)에 저항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왜? 그는 권력화의 대항마를 이 때에 발견했다. 그것은 아무렇지 않게 타인의 세계에 불쑥 들어가 그들로부터 아주 작은 것들을 받아오는(그리고 아마도, 그 작은 것들을 되돌려줬을) 선생님의 행위 전체, 즉 간단한 주고받음의 풍광이다.


득녕이 잡지의 고료 청산 방식을 1/n이라는 파격적 형식으로 정한 것도 이러한 해석의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득녕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그는 누구보다 사과를 빠르게 하는 이로 그려진다. 경수라는 괴물과의 관계가 완전히 깨어지지 않았던 이유 역시 득녕이 가진 아주 가벼운, 지나치게 가벼워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증여’의 감각 때문이다. 거대한 것을 거대하게 획득하고 그것을 다시 거대하게 되돌리는 것이 아닌, 작은 것들 간의 교환을 통한 장기적인 행위 일체. 득녕은 그곳에서 가능성을 본다.


이는 이후에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천재 작가 수웅과의 대화에서도 득녕은 자신이 욕심을 부리고 있음을 아주 정확히 인정한다. 이런 태도는 이후 관계자들에 의한 잡지 발간의 위기(그리고 권력의 재편성) 앞에서 수웅의 조력을 받는 식으로 다시 되돌려받게 된다. 물론 마영신은 이런 상생 의식의 작동을 절대적 효과로 말하지는 않는다. 종종 진위를 알 수 없는 득녕의 행동, 혹은 반복적으로 잡지 오락실에 발생하는 위기들. 모든 것이 상생의 의지만로 해결되거나 완성되지는 않을 뿐더러, 그것을 유지하는 것 역시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하지만 결국 결론은 이것이다. 이러한 의지가 득녕에게 가져다준 의미란 물질 세계의 성공이 완전한 성공은 아니라는 점이다. 때문에 물질 세계의 실패 역시 완전한 실패가 아니게 된다. 득녕은 이런 종류의 발언을 몇번이고 반복한다. 망하면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왜 그것이 가능한가 ? 이에 대해선 ‘되돌려받음’을 서로에게 실천할 타인의 존재 이외에는 다른 답을 낼 수가 없다. 이 행위의 핵심은 성공이라는 결과로부터 발생하는 힘이 하나의 존재에 맺히지 않도록 끝없이 힘을 순환시킨다는 점이다. 득녕이 선생님이 보여준 초탈한 주고받음의 풍광, 득녕이 선택한 1/n의 시스템. 이 모든 것의 목적은 응집되는 힘의 조절, 권력이라는 자연화된 현상에 대한 최대한의 대응 양식으로 선택된 방법들이다. 따라서 마영신은 <아티스트>를 빌어 물질 세계의 성공과 그 부산물인 권력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혹은 하나의 달콤한 결실로 여기는 모든 이들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그 권력이 두렵거나 무섭지 않습니까? 그것이 물질 세계의 몰락과 함께 파멸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한 힘의 찬탈이 당신이 원하는 성공의 본질입니까?


본편의 후속작 격인 <김경수의 길>에서, 득녕은 출판사의 운영에 실패해 은둔한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작품의 말미에 신작 소설로 화려하게 부활하고, 이 사실이 경수의 변화라는 결과로 연결된다. 이 때에 득녕의 부활을 확인하게 된 경수의 시선은 다시금, 선생님을 지켜보던 득녕의 시선과 연결된다. 본다는 것, 확인한다는 것에 의해 삶의 태도는 전이된다. 그렇다면 어쩌면 ‘아티스트’라는 제목은 이러한 삶의 태도에 대한 마영신의 하나의 규정일지도 모른다.



어린이들과 다를 바 하나 없는 예술가들의 욕망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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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인

2017년 신인만화평론 공모로 만화평론가로 등단, 2022년 GG 게임 비평 공모로 게임평론가로 등단하였다. 영화를 전공했으며 평소에는 만화, 게임, 영화에 관한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