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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보국’의 그림자를 돌아보며 - 이종철 작가의 '제철동 사람들: 공단 마을 이야기'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제철동 사람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종철 작가의 자서전적인 이야기 '제철동 사람들'

2023-08-28 박근형

[ 이종철 작가의 '제철동 사람들' ]


프레카리아트(precariat).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 있는 비정규직, 파견직 등을 뜻하는 신조어다. 무산 계급 노동자를 의미하는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와 불안정함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프레카리오(Precario)의 합성어로, 영국의 경제학자 가이 스탠딩이 처음 제시하였다. 그는 1980년대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의 파도가 기존의 안정적인 풀타임 노동자(올드 프롤레타리아)도, 엘리트 화이트 칼라 계층(샐러리아트)도 아닌 새로운 노동자 계층을 만들어냈다고 보고, 프레카리아트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안했다(1).

<까대기>를 그렸던 이종철 작가의 두 번째 작품 <제철동 사람들>에 등장하는 제철동 주민들은 대다수가 프레카리아트다. 고정적인 수입이 필요해 이종철 작가가 6년간 몸담았던 ‘까대기’ 아르바이트와, 함께 다루었던 택배 기사들도 프레카리아트였다. <제철동 사람들>에는 다양한 프레카리아트가 등장한다. 영세 자영업자, 비정규직, 파견직 노동자, 가게 이모들, 다방 누나들.... 불안한 벌이과 열악한 경제 조건에 의해 규정되는 삶은 순탄치 못하다. 마을 어른들의 손과 발에는 항상 때가 묻어있고, 주인공 ‘강이’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상주식당’에 찾아오는 제철소 사람들에게서는 쇳가루 냄새가 났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젊은 엄마 핼리는 안정적인 일자리도, 넉넉한 수입도 없다. 그녀도 프레카리아트라는 신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핼리는 디즈니월드 근방, 집이 없는 빈민층이 장기 투숙하는 모텔방에서 딸과 단둘이 살아간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핼리와 무니 모녀가 묵고 있는 ‘매직 캐슬’ 모텔은 꿈과 환상의 상징인 디즈니랜드 인근에 있다. 제철동 사람들은 제철소 근처에 살지만 포항제철 정직원과 하청 직원 및 일용직 노동자들, 농민들, 상가사람들이 사는 동네가 구분되어 있었다. 정직원들이 사는 주택단지는 난방과 온수가 무료 제공되었지만, 마을 사람들이 사는 곳은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쓰레기 매립장이 들어선 후에야 보상으로 지어진 목욕탕을 통해 온수를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이처럼 대비되는 공간구조는 작품의 메시지를 강조하는데 효과를 발휘한다.

핼리는 딸 무니에게만큼은 헌신적이지만, 상기했듯이 노동과 경제 조건은 삶을 규정한다. 학력도, 경력도, 직업도, 아무것도 없는 핼리가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리는 무망하다. 모텔을 전전하는 나날 속에서 무니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다. 제대로 된 보호와 훈육을 받을 수 없는 아이들은 곧잘 위험한 장난을 벌인다. 직업을 구할 수도 없고, 정부로부터도 아무런 지원을 받을 수 없는 핼리와 무니는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다. 핼리는 날품팔이로라도 생계를 꾸리고자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결국 그녀는 무니와 함께하는 생활을 존속하기 위해 비도덕적인 일에도 손을 대기 시작한다. 

제철동의 어른들 역시 생계를 잇기에 여념이 없다. 어른들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필수적인 소득을 버는 동안, 가장 지켜져야 할 아이들은 보호자 없이 방치되는 역설이 발생한다. 무니와 친구는 아동 성범죄자에게 노출되며(다행히 이 영화의 등장인물 중 가장 ‘정상적인 어른’인 모텔 관리자 바비 덕분에 위험에 처하는 일은 없었다), 제철동에서는 계도해 줄 어른이 없어 엇나가는 친구들이 생긴다. 주인공 강이도 어린 나이에 어른들이 버린 꽁초를 피워보기도 하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친구들과 버려진 건물에서 아침까지 놀다 들어오기 일쑤다. 사회/경제적 약자인 핼리 모녀와, 제철동의 주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제철동 사람들>은 섣부른 가치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선택은 그들이 처한 조건하에서 핍진성과 개연성을 획득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감독의 시선이 그렇듯이, 제철동 사람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연민이나 동정으로 치우침이 없다. 누군가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순간, 대상에게는 ‘착해야 한다’는 일종의 선입견이 지워진다. 연민의 대상인 약자는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어려움에 처했으며, 가엾고 선량해야 한다는 일종의 도덕적 굴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선한 이미지의 강조는 범죄 사건에 대해 ‘착한 피해자의 자격’을 논하는 언론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독자의 관심을 ‘안타까운 개인사’에 국한시키고 착한 약자와 그렇지 않은 약자로 등급을 나눈다(2). <제철동 사람들>은 이러한 프레임의 함정을 피해, 유복하다고는 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사람들이 제각각 어떻게 공동체와 삶을 꾸려가는지, 과도한 정동을 유발하지 않고도 담담히 묘사하였다.


그렇다면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제철동 사람들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핼리와 무니 등 복지 취약 계층이 처한 여건을 직설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그들이 놓여있는 상황과 사건을 통해 관객들에게 제시한다. 다음 주 방세조차 낼 수 없는 핼리의 마음을 핼리가 직접, 혹은 감독이 개입하여 설명하지 않고 노을을 배경으로 핼리의 처진 어깨를 카메라가 뒤에서 바라보는 식이다. 뜨거운 플로리다의 햇살과, 관광도시답게 건물마다 선명하게 칠해진 색감을 극빈층의 현실과 대비하여 강조함으로써, 영화의 분위기를 우울하거나 무겁게 만들지 않고도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전달하였다.

반면 <제철동 사람들>은 주인공 강이의 독백이 독자들이 알아야 할 정보를 전달하는데 큰 비중을 차지함으로써 강이의 성장담, 또는 제목 그대로 1990-2000년대 초반의 제철동 공단 마을의 풍경에 대한 회고록의 성향이 짙다. 그러나 제철동 사람들은 단순히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작품은 르포르타주적 성격도 띠는데, 법과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였던 제철동 프레카리아트들의 삶을 독백을 통해 사실적인 정보와 함께 전달함으로써 개인사 뿐 아니라 사회적 이슈 역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인공의 부모님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일하던 한 ‘이모님’의 남편은 하청업제 근로자로, 제철소의 오래된 배관을 수리하다가 추락하는 사고를 당한다. 이 에피소드는 해당 페이지(141p)의 마지막 컷의 독백을 통해 사회적 문제로 비화한다. “제철소에서 사고를 당하는 이들은 대부분 일용직이거나 하청 노동자들이었다.” <제철동 사람들>에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작품 곳곳에서 드러난다. ‘산업재해’라는 개인적 사고는 공동의 누적된 에피소드가 되면서 더 이상 개인사에 머무르지 않는다. 제철동 주민들의 개인사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제철 산업과 분리될 수 없었고, 따라서 사회적 이슈인 산업재해 역시 개인사와 분리될 수 없었다. <까대기>, <제철동 사람들>은 주인공 ‘강이’와 ‘바다’를 표면적으로 앞세운 이종철 작가의 회고를 넘어서, 두 작품 모두 노동의 조건이 개인의 삶과 어떻게 결부되는지를 다룬다. 그리고 노동의 조건은 개인이 결정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개인의 삶을 규정짓는 노동 환경과 경제적 여건은 체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이종철 작가는 두 작품에 연달아, 사람에게는 휴머니즘적 관점으로 접근하되, 신자유주의 시스템 아래의 노동환경이 결정되고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객관적이고 냉정한 견지를 유지한다. 

책장을 덮기 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철소에서 일용노동자로 근무해온 주인공 강이가 대학 입학을 앞두고 일을 그만둔 귀갓길의 에피소드로 돌아가 본다. 강이는 공단에서 근무하며 겪었던 위험천만했던 경험들을 회상하며 차창 밖을 바라본다. 노동자의 인영이 흐릿하게 제철소 굴뚝 위로 나타나는 장면이 이 작품에서는 가장 가슴 서늘해지는 순간이다. 그 너머로 우리는 읽을 수 있다. ‘제철보국’이라는 프로파간다 아래 스러져간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1) SBS뉴스. (2023. 7. 8.). “일자리가 사라진다"…불안정 노동의 시대.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7259861&plink=ORI&cooper=NAVER&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2) 유정아. (2016. 6. 17.). 피해자의 자격 : '착한 피해자'를 추모하는 나라. 직썰. https://www.ziksir.com/news/articleView.html?idxno=3405



《까대기》로 ‘2019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한 이종철 작가의 신작으로 3년 만에 선보이는 그래픽노블이다. 포스코로 잘 알려진 경북 포항의 공단 마을 제철동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았다.
주인공 일곱 살 강이는 제철동 상가 거리에서 식당을 하는 부모님과 함께 식당에서 만난 이모들, 제철소 노동자, 한동네에서 자란 친구들과 친척들까지 여러 사람과 관계 맺으며 성장한다.
《까대기》 이후 한층 더 성숙한 이종철 작가의 만화는 강이의 성장기와 함께 포항의 특수한 지역 정서와 사회상을 따뜻하게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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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형

‘좋음’을 다정함을 담아, 적확하게 쓰고 싶습니다.

2017 디지털만화규장각 신인만화평론 공모전 가작
2018 제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감상문 공모전 가작
2018. 6. ~2019. 1. 디지털만화규장각 만화웹진 만화리뷰 연재
2019 한국만화박물관 소장자료 연구 필진 참여
2021 제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감상문 공모전 대상
2023 전북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재학 중
2024 대한민국만화평론공모전 최우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