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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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안에서 : 여름이면 떠오를 거야

본격적인 여름을 앞둔 지금, 나무 그늘을 지나거나 여름 바다를 바라볼 때 <여름 안에서>가 떠오를 것 같다

2023-06-19 박민지

여름이 오면 당연하게 들리는 노래가 있다. 내년이면 발매된 지 30년이 되는 남성 듀오 듀스의 <여름 안에서>다. 동명의 만화를 발견했을 때 궁금했다. 전주만 흘러도 습관적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는 대중을 겨냥한 고도의 기획일까. 일단 눈에 띄는 제목 덕분에 책을 꺼내 보았다. 책에는 <여름 안에서>, <파노라마> 두 편의 단편 만화가 수록되었다. 표지 속 소년, 소녀는 잡초가 무성히 자란 폐건물 안을 응시하며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이별의식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 첫 번째 작품 <여름 안에서>의 주인공 주찬이는 여름방학을 앞두고 반려묘 ‘치치’를 잃었다. 클래스메이트에게 괴롭힘당하며 외톨이가 된 주찬에게 유일한 친구였다. 예고 없이 찾아온 이별 앞에 주찬이는 커다란 상실감을 느낀다. 반려인들 사이에선 반려동물이 죽으면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라고 표현한다. 죽음 너머에 무언가 있길, 또 다른 삶이 평온하길 바라는 염원이다. 주찬이는 치치가 비 오는 날 무지개를 타고 하늘나라로 가기 전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아직 마지막 인사를 건네지 못했기에 치치의 영혼을 찾는 미션은 간절하다. 그러나 집 나간 고양이를 찾을 확률도 희박한데 고양이 영혼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주찬이는 여름방학이 시작하자 동네 길고양이들을 찾아다니며 영혼의 행방을 쫓는다. 주찬이는 지금 치치와 이별하는 중이다.


묘한 친구

고양이는 묘한 동물이다. 호기심이 많아 열린 문밖으로 나가기 마련이지만 낯선 환경에 금세 겁을 먹고 몸을 숨긴다. 반려인이 불러도 나타나지 않거나 발견되지 못해 영영 잃어버리는 사례가 꽤 많다. 그런데 치치는 ‘몸’조차 없다. 그럼 ‘영혼’은 어떻게 찾을까? 영혼이 진짜 존재하는지 죽은 육신의 형상과 같은지 사람의 눈에 보일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죽은 고양이의 영혼을 찾겠다는 주찬의 모험은 무모하고 순수해서 애처롭다. 그런 주찬이에게 선뜻 함께 다녀주겠다는 여자애가 나타난다. 그리 큰 도움이 되진 않지만, 막상 만나면 반갑고 엉뚱한 행동 덕에 위기를 모면하기도 한다. 대가 없이 함께하고 도와주는 그 아이를 ‘친구’라고 불러도 될까. 치치처럼 있는 그대로의 주찬이를 좋아해 주는 여자애는 주찬이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친구의 모습이 아닐까. 어느덧 치치의 영혼이 떠날 시간이 임박한다. 반갑지 않은 비가 내리고 주찬이는 친구와 빗속으로 뛰어간다. 주찬이가 치치에게 건네고픈 말은 무엇일까? 



한여름의 파노라마

두 번째 작품 <파노라마>는 일본 오키나와 해변을 무대로 펼쳐진다. 여행객 해리는 바닷가에서 파라솔을 대여하는 여고생 치에와 만난다. 그러나 치에는 해리의 카메라를 훔쳐 간다. 해리는 치에가 옛 친구와 닮았다는 이유로 용서하지만, 이후 치에와 얽히며 차분했던 여행이 복잡하게 흐른다. <파노라마>는 여름, 이별, 우연한 만남과 우정 등 <여름 안에서>와 키워드가 중첩되지만, 현실과 꿈이 혼재하는 듯 몽환적인 <여름 안에서>와 달리 오키나와의 숲, 마을, 바다, 수족관 등 특유의 이국적인 풍광과 만화적 연출로 전혀 다른 액션과 에너지를 보여준다. 



시선이 머무는 농담(弄談)

디지털 드로잉이 보편화한 시대에 수작업으로 원고를 제작하는 건 번거롭고 작업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성률 작가는 자신이 ‘아날로그의 끝자락에서 아직 마음껏 종이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세대’라고 소회를 밝혔다. <여름 안에서>는 나무 그늘을 지나거나 수풀 속을 뒤지거나 잡초가 무성한 장소를 누비는 등 그림자가 드리워진 장면이 자주 나온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옅고도 짙은 녹음(綠陰)을 표현한 세밀한 붓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단편 만화임에도 읽는 시간이 꽤 걸리는 걸 발견할 수 있다. <파노라마> 역시 모든 컷에 빈틈없이 작가의 손길이 닿아 책상을 쉽게 넘기기 어렵다. 한 컷 한 컷에 시선이 오래 머무는 경험은 가독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웹툰과 다른 매력을 느끼게 하며 이미지의 잔상이 오래 남는 효과가 있다. 본격적인 여름을 앞둔 지금, 나무 그늘을 지나거나 여름 바다를 바라볼 때 <여름 안에서>가 떠오를 것 같다.



우연한 만남을 기대하게 되는 계절, 여름. 『여름 안에서』는 우연한 만남이 마법 같은 인연으로 변하는 순간을 그린 단편만화집이다. 하늘나라로 떠난 고양이의 영혼을 찾으려는 ‘주찬’과 그를 따라나선 의문의 소녀 ‘지수’. 사랑했던 친구를 잃고 여행을 떠난 ‘해리’와 그곳에서 만난, 죽은 친구와 닮은 아이 ‘치에’.

소중한 존재의 상실을 겪은 주인공들은 우연히 새로운 인연을 만나 눈부신 햇살 아래 조금은 무모하고 솔직하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여전히 미열처럼 남아 있는 아픔에 서툴고 엉뚱한 모습이 될 때도 있지만 그들이 용기를 내어 다가간 순간, 신비로운 여름이 이윽고 시작된다.




필진이미지

박민지

만화평론가
2021 만화평론공모전 신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