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선은 꽤 독특한 히스토리를 가진 작가다. 그는 2015년, 여전히 대표적인 웹툰 플랫폼인 네이버 웹툰에서 <우바우>로 데뷔한다. 연필을 베이스로하는 독특하고 귀여운 화풍, 한편 그와 충돌하는 작품의 신랄하면서도 우울한 무드는 많은 이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우바우>는 2016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끝으로 종료되었고, 네이버에서 잇선의 차기작을 볼 수 없었다.
그는 이후 특별한 플랫폼을 두지 않고 블로그, SNS를 중심으로 연재하고 메일링 서비스나 출판을 위해 온라인 후원 서비스를 이용해 작품을 이어나갔다. 이 시기의 작품인 <뚜리빼>(총 2권), <모지리>(총 4권)는 천만원 단위의 후원금 모집에 성공하였으나 그 사이사이 진행한 굿즈들은 애석하게도 실패를 겪었고, <이상한 다이어리> 2권에 이르러서는 600만원 정도의 후원에 그치기도 했다. 따라서 그의 신작 <이상징후>가 카카오 웹툰이라는 플랫폼에 연재된 것은 오히려 신선한 일이다. 당대의 가장 메이저한 플랫폼에서 자생 만화가 시기를 거쳐 다시금 플랫폼으로 귀환한 것이다. 이 변곡이 잇선이라는 작가의 작품과 그렇게 유리되지 않는 지점이 재미있다. 가장 밝은 혹은 두드러지는 지점과 눈에 띄지 않는 지점간의 널뛰기, 가장 자본주의적인 세계와 그로부터 탈피하려는 대안적 움직임 충돌할 때의 에너지가 바로 잇선 만화의 독특한 성질이며 이는 그의 히스토리와도 연결된다.
잇선은 언제나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이상징후> 1권의 부록에서 보이듯, 그가 그러한 작동을 회피하려 할 때 조차 지나치게 당연히 드러나버린다. 이 때 반영되는 것은 단순히 그가 겪어온 역사 자체가 아니라 생을 통해 감지한 어떤 분열성 쪽이다. 잇선 만화는 언제나 유사한 테마를 담지한다. 그의 만화는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적응능력이 부재한 존재들이 행복이라는 목표선을 갈망할 때 생기는 불협화음을 그린다. 이 존재들은 언제나 동일한 딜레마에 봉착한다. 그것은 바로 ‘돈이 없어 불행’하면서 동시에 ‘돈을 버는 행위 역시 불행’하다는 것이다. 불행하기 때문에 돈을 원하지만, 돈을 원하는 동안 또 다시 불행에 빠지는 그 하강곡선이 끝없이 반복된다.
여기서 언제나 거론되는 것은 관계의 문제, 그로부터 형성되는 소소한 행복이라는 또 다른 목표지점이다. 잇선 만화의 주체들은 언제나 이러한 도달에 이끌리고, 실제로 그로부터 대안된 행복을 맛본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 다시금 자본주의의 문제와 접촉할 때, 이 ‘소소한 행복’이라는 것의 성질, 즉 ‘소소함’을 지나치게 맛본다. 따라서 이들은 정말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며 분열한다. 돈을 벌 능력이 없는 존재가 끝도없이 괴로워하다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며 소소한 행복라는 대안과 접촉한다. 이때 잇선은 이 접촉에서 질문을 끝내지 않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게 진짜로 부재와 불안을 덮을 정도의 행복감인가? 돈의 부재가 그러한 행복감의 숨통을 끊어놓지 않을까? 잇선 주체들이 가지는 진짜 혼란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온다. 소소한 행복이라는 전제를 믿기만 한다면 현실의 문제들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음에도 도저히 그것을 믿지 못한다. 이러한 불신은 자기자신을 향해 총구를 돌리고, 인물들은 무능과 부덕의 사이에서 자기혐오를 겪는다. 그가 항상 동화를 방불케하는 환상적인 톤을 사용하는 것 역시 이러한 분열과 연결된다. 토실토실하고 앙증맞고 귀여운 의성어를 만들어내는 존재들이 등장해 지나치게 신랄하고 염세적인 말을 욕설과 함께 내뱉을 때, 작품의 톤앤매너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겅충겅충 넘어다닌다.
[그림 1 - <모지리>]
하지만 그가 언제나 캐릭터를 귀여운 존재로 묘사한다는 사실을 지워서는 안된다. 잇선은 자주 다수의 주인공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작품을 전개시키는데, 결국 이들이 마주하는 문제지점은 언제나 동일한 형태로 수렴된다. 이 모든 주인공들은 마치 하나의 원점(작가 자신)을 중심으로 떨어져나온 파편들처럼 보인다. 그리고 원점에 의해 귀여운 외피를 입는다. 잇선은 이들, 자신의 삶으로부터 떨어져나온 이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현실의 시련을 내리지만 동시에 이들이 귀여워 견딜 수 없는 것 같다. 몽상적 행복과 현실의 문제, 고통과 귀여움의 반복과 같은 갭이야말로 잇선 만화를 상징하는 지형도다.
그런 의미에서 <이상징후>는 잇선에게 있어서도 ‘이상징후’처럼 보인다. 1권에서 여전히 자신의 이야기임을 눈치채였다고 너스레를 떨지만, 이 작품은 그의 어떤 작품보다도 작가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가 언제나 작품에 반영하던 그 테마는 ‘ㅇㅇ인간’이라는 수상한 존재로 변화하는 다수의 인물들이 겪는 사건으로 나뉘어진다. 특기할 점은 개별 사건을 움직이는 감정의 근간에는 확고한 동일성이 없다는 점이다. 오직 그들이 이상현상을 겪는 배경의 세계만이 공유될 뿐이다. 다양한 연령과 직업을 가진 이 인물들은 거의 아이콘에 가까웠던 그의 전작 주인공들과는 확연히 다른 구체성을 가진다. <모지리>의 리찌, 스몰볼, 까슬이, 솜솜이, 대가리좃, 털복숭이 등 작가로부터 비롯된 파편에 대한 디자인된 기표들과는 확연히 다른 실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상징후>에서 잇선은 전작들과 조금 다른 위치를 점유하는 작가가 된다. 그는 이번작에선 발화주체가 아닌 관찰자의 위치로 멀직히 자리를 옮긴다. 따라서 이상 현상을 겪는 모든 이들은 관찰의 결과로서 형성된 개별적 인간군상이 된다. 이 작품에서 잇선의 위치에 가장 가까운 존재는 아마도 이상현상 연구소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는 서리일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의 규칙에 적응하지 못해 괴로워하다 끝내 다른 존재로 변모하는 이들을 멀직이서 지켜보고 공감해주며 때로는 명쾌하지 않은 해답을 던진다. 무엇보다 그는, 이러한 존재들을 모두 귀엽게 바라본다. 그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던 그 시선을, 조금 더 명확한 세계 쪽으로 돌린 셈이다.
[그림 2 - <이상징후> 1권]
물론 그로 인해서 어쩐지 조금 불편해지는 지점도 있다. 예를 들자면, 잇선의 전작들에서 어떠한 ‘악’이란 특별히 구체화되지 않는 무언가였다. 오히려 전화기 너머로 계약을 강요하는 (대담하게도 실명처리된) 네이버 같은, 세계의 법칙을 구체화한듯한 부정형의 무언가가 주인공들을 괴롭히는 현상으로 지칭되었다. 과거의 잇선이 마주보고 싶었던 어떤 음습한 기운이란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하는 무능한 자신 혹은 소소한 행복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덕한 자신으로 지칭되는 모순적 자기 태도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시선이 외부의 현상과 마주치자 몇 가지가 구체화된 악으로 묘사된다. 이를테면 ‘햄스터 인간 편’에 등장하는 이기적인 상사들 같은 존재들 말이다. 잇선의 시선, 대상을 바라보는 온유함은 <모지리>의 악당 피글렛에게조차 질투심을 느끼는 귀여운 순간을 부여하곤 했다. 하지만 ‘햄스터 인간’의 악당들에게는 그런 온건의 시선을 부여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을 죽음으로 이끌고 햄스터 인간의 폭주를 정당화한 자들에 대한 일정량의 비판이 시선이 있긴 하나, 그것이 이들에게 설정된 어떤 ‘본질적인 악’을 상쇄시키지 못한다. 때문에 조금, 내측을 향하던 잇선이 보이는 그 모순적이지만 귀여운 세상에 균열이 발생했음을 느껴버리고 만다.
그런데 덕분에 이 작품의 제목이 지칭하는 ‘이상현상’에 대해 다시금 재고하게 된다. 작품의 말미에서 서리는 이상현상을 겪는 모든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대안된 사회 (그의 전작으로부터 이름을 빌려온) ’우바우’를 만든다. 이 선택은 단순히 이들을 기존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상현상이라는 현상을 일상화시키는 대안적 체제를 만들기 위한 계획과도 같다. 따라서 이 새로운 세계가 조직되는 순간 ‘이상현상’은 더이상 이상한 현상이 아니라 보편적인 현상으로 변모한다. 따라서 제목인 <이상현상>은 이 순간 그 의미를 잃는다. 이럴 때 그 이상현상은 어느 즈음에 태그되어야 할까. 오히려 이 타이틀은, 잇선 본인의 온유함으로는 포용하지 못하는 세상의 어느 냉혹함으로 연결되는 것 아닐까. 따라서 햄스터 인간인 이차장의 상사들이야 말로, 도저히 어느 방향에서 안아줘야 할지 몰라 작품에 남겨진 ‘이상현상’이다. 이 시선은 그들에 대한 지탄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그러한 존재가 된 이유에 대해 도저히 해석할 수 없음을 시인하는 작가의 항복 선언같은 것이다.
<이상현상>은 잇선이라는 작가에게 있어 줄탁동시의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표출자라기 보다는 관찰자의 위치에 선다. 그리고 비로소 세계의 위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고민한다. 따라서 <이상현상>은 우리에게 이러한 고민을 던진다. 당신이 이 세계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이상한 것인가 세계가 이상한 것인가. 느릿느릿한 당신이 당신의 모습 그대로 버섯인 쪽이 혹은 거북이인 쪽이 더 일상적인 세계이지 않는가. 그렇지 못한 이 세계야 말로 어찌보면 이상한 세계이지 않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일상이 오히려 이상현상의 세계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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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복잡한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인간성을 상실할 때, 이상현상이 발현 된다.
이상 현상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사람이 아닌 이상한 모습으로 변하는가 하면 동시에 이상한 능력이 생기기도 한다.
이런 이상 현상을 치료해주는 그곳의 연구 소장 서리는 사람의 모습을 한 채 인간들의 병을 연구를 하고 치료 해주며 아픈 사람들을 돕는 도깨비이다.
인간을 돕는 착한 도깨비 같지만 서리는 언제나 비웃으며 인간들에게 말한다.
“누구나 인생이 지옥처럼 느껴지면 이상 현상이 벌어집니다. 다음 차례는 바로 당신일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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