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환 작가의 그래픽노블 <재생력>에서의 ‘재생력’은 다양한 인간들이 욕망을 투사하는 대상이다. <재생력>은 큰 두 갈래의 서사를 얽으며 사건을 발전시키는데, 한 갈래는 재생력을 둘러싼 인간들의 욕망의 충돌에 대해 다루고, 다른 하나는 단순히 인간의 육체를 이용해 되살아난 피조물에 불과했던 ‘머리’와 ‘매리’가 어떻게 인간이 되어가는지를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전자는 인간성을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하나는 인간성을 찾아가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재생력’은 오명준 교수에게는 죽은 이를 살려내는 기술 그 자체이자 그에게 창조주와 같은 권능을 부여하는 수단이고, 박태준 교수에게는 질병과 장애를 치유할 수 있는 상업적인 소스가 된다. <재생력>의 시대적 배경은 오 교수의 학술적 성과 덕분에(그리고 박 교수가 훔쳐 가 상업적으로 성공시킨 덕분에) 악질적인 유전병들이 극복되어 인간의 기대수명이 대폭 늘어났으나, 오히려 수명의 연장이 용이해짐으로써 가치가 전도되어 생명 경시 사상이 만연해진 사회다. ‘머리’와 ‘매리’의 아버지 격인 오 교수 역시 자신이 되살려낸 이들을 어떠한 인격체로 보지 않으며, 그가 도덕적 고뇌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모습 또한 드러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부상을 입은 머리와 매리는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고쳐야’ 하는 대상이다. 오 교수는 머리를 먼저 되살리는 실험에 성공하고 이어 무연고 시체였던 여자 실험체를 되살리는데, 여호와가 아담을 먼저 창조하고 그의 갈비뼈로 하와를 창조한 것을 본뜨기라도 한 듯 그녀의 이름은 ‘머리’에 모음 ‘ㅣ’를 더한 ‘매리’가 된다.
오 교수는 작중 내내 그가 후반부에 서술한 대로(“내 자신이 신이된 듯한…. 쾌감.”(208면)) 머리와 매리의 창조주로써 우월적 위치에서 행동한다. 여호와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을 벗어나지 않도록 지시하듯이 머리와 매리의 행동반경은 연구실과 폐가 이내의 구역으로 제한되며, 매리를 구하느라 머리가 신체에 큰 손상을 입었을 때 오 교수는 머리의 존재에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다고 토로한다. 그들의 재생뿐 아니라 번식까지도 전적으로 오 교수의 선택에 달려있으므로, 오 교수와 그들의 관계는 창조주-피창조물, 혹은 주인과 예속된 노예 이상이 되지 못한다. 관계의 역전은 오 교수가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피조물인 머리에게 생의 연장을 애원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전은 실상 절벽에서 추락하는 매리를 머리가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여 구했을 때, 그리고 산산조각 난 머리의 육체를 매리가 연구실까지 끌고 돌아온 시점에서 이루어진다. 이때 그들의 자아는 예속된 노예 상태에서 선택이 가능한 주체로써 탈바꿈된다.
피조물인 머리의 욕망은 어디로 향하는가? 그가 동등한 지위에서 최초로 관계 맺는 대상은 동네의 검은 고양이이며, 검은 고양이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이 의미를 가진 존재의 죽음을 겪는다. 그는 두 번째로 ‘매리’와 관계를 맺는데, 그녀의 심장박동 소리를 통해 그녀가 자신과 똑같이 살아있는 존재임을 느끼고, 그녀와 교류함으로써 관계에 대한 진일보된 인식을 갖는다. 서로를 위험에서 구해준 이후, 머리는 회복될 때까지 지하에서 지내라는 오 교수의 말을 거역하고 매리에게 다가가는데, 그 탓에 잠에서 깬 매리는 머리의 얼굴로 귀를 가져다 대고 그의 숨소리를 듣는다. 아직 언어로 소통이 불가능한 피조물들 간의 이 ‘심장박동’과 ‘숨소리’를 듣는 행위는 서로가 거기에 존재함을, 나와 함께 살아있음을 공명하며 느끼는 유대감의 발현으로 보인다. 이러한 매리와 머리의 모습은 무연고 시신을 실험용으로 팔아넘기는 병원의 구급 대원들, 타인의 성과를 사과 한마디 없이 훔치고 제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박 교수나, 살인을 일종의 유희로 여기는 살인청부업자의 모습과 윤리적 대조를 이룬다.
한편 구멍 뚫린 지붕에 대한 은유가 반복적으로 드러나는데 머리가 지붕의 구멍을 통해 위에서 아래로 내리쬐는 빛을 올려다보고, 가로등 불빛을 올려다보거나, 창문을 통해 달빛이 드는 장면등이 작중 빈번히 등장한다. 지붕 위 빛이 드는 세상은 머리가 닿고 싶어 하는 지점이다. 머리의 환상 속에서는 그가 자유롭게 행동하고 대화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피조물(노예)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일일 것이다. 그의 꿈속에서는 거꾸로 죽어서 되살아난 ‘머리’의 삶이 꿈으로 간주된다. 꿈속에서 검은 고양이는 “인간은 조심성 없이 내딛는 것만 생각한다”라며 머리를 타박하나, 그럼에도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던 머리는 고양이에게 다가가고, 그리고 또 매리를 발견하여 그녀에게 달려간다. 머리의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지붕이 부서지는 바람에 그는 아래로 끝없이 추락한다. 비록 위태로워 보이지만 머리가 그토록 닿길 바랐던 지붕 위의 삶. 꿈속에서나마 그곳에 겨우 도달했음에도, 인간이 놓인 삶의 조건의 무게에서 비롯하는 중력과, 그가 유일하게 접촉할 수 있는 ‘매리’라는 타자의 존재는 그를 현실로 끌어내린다. 피조물이라는 구속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종국에 선택하는 것은 그에게 소중한 존재들이다. 종내 그가 다시 발붙일 수 밖에 없는 생은 여기, 이곳에 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수명을 기술적으로 연장하고 신체적 제약을 극복하는 기술적 성취가 아니라, 살얼음 같은 짧은 생이라도 어떤 신념을 갖고 무엇을 지향하는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역설적이게도 박 교수에게 노벨상을 수여할 정도로 세상을 뒤흔들어 놓았다는 세포 회복 기술은 머리에게는 어떤 존재론적 의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술이 의식의 재생을 수반하지 않았으므로 생전의 머리와 사후 부활한 머리는 다른 인격을 지니고 있었다. 오 교수는 머리에게 다시 살게 해준 것이 감사하지 않냐는 교만한 질문을 던지지만(227면) 오 교수의 말마따나 “태어나고 죽는 것이 여러분의 의지가 아니”라면(75면) 다시 살게 해준 것도, 그리고 언젠가 마주할 죽음의 순간도 머리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으므로 오 교수에게는 감사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머리에게 중요한 것은 검은 고양이와 매리의 존재였으나, 둘 중 누구도 종국적으로 되살아나지 못했다. 마치 생명과 죽음마저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한 인간에게 벌이라도 내린 것처럼, 에필로그의 텔레비전 뉴스에는 7.4. 강진에 사망자가 급중하고 있다는 헤드라인이 흐른다.
그러나 <재생력>이 그리는 것이 아포칼립스에 이르는 미래는 아니다. 먼저 오 교수가 실시한 번식과 보육에 대한 실험의 결과로 매리의 아기는 무사히 태어나고, 에필로그에서의 머리와 노파와의 대화를 통해 머리의 ‘지붕’은 ‘잘 고쳤’음을 알 수 있다. 텔레비전에서 어떤 소식이 흘러나온다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오늘 먹을 양식을 희구하는 일과 품 안의 아이가 더 소중한 것이다. 어쩌면 그가 비록 염원하던 대로 지붕 위를 완벽히 걸어갈 수는 없었지만, 튼튼한 지붕 아래 아이와 함께 안전히 살아가는 것도 주체적인 삶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재생력’은 단순히 세포가 재생하는 힘이 아니라, 세상이 어떠한 형태로 발전하거나 퇴보해 가더라도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타자와 함께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 도서 소개 영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