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것은 아프다. 그것은 당신의 피부가 벗겨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든 당신의 피부를 가지고 떠날 수 있음을 아는 것이다.”(1) - Sosan Sontag
많은 연인들이 상호 간의 신뢰를 통한 안정감을 욕망한다는 것이 말해주는 바는 안정감을 얻지 못한 연인이 많다는 사실이다. 자신을 ‘진짜’ 사랑하는지 확인받고 싶은 마음은 이 사람이 나를 ‘진짜’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에서 기인하며 그것은 연인이라는 법적 효력 없이 묶여버린 가벼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든 떠나버릴 수 있는 관계 속에서 불안이 제거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지속적인 확인이 필요한 불안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안정감을 획득한 것처럼 보여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연인들은 다시 불안해진다. 다시 말하면 연인들은 ‘안정’이라는 환상을 현실화하고자 하는 다툼을 통해 관계를 지속한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작가가 말했듯이 “로맨스는 불안과 확인의 서사(2)”라면, 로맨스와 스릴러는 구별 불가능하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에서 긴장을 유발하는 질문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윤수지는 권우빈을 ‘진짜로’ 사랑하는가?”로 압축된다. 윤수지는 권우빈을 사랑하는가? 혹은 그렇게 ‘보이도록’ 연기하는 것 뿐인가?
적어도 권우빈은 윤수지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데, 역설적이게도 권우빈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불안하다.
“이제 내가 느끼는 행복은 대부분 당신에게 달려 있게 됐다. 행복 같은 삶의 목표나 근간과도 다름없는 것들을 순식간에 타인에게 의탁해버리고 상대방도 나와 마찬가지이길 바라는 이런 정신 나간 상태가 사랑인 걸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행복을 완전히 의탁하고 상대방도 나에게 행복을 의탁하길 바라는 마음이 ‘사랑’인지 묻는 권우빈의 독백은 사랑의 구조가 ‘불안과 확인’이라는 절차를 통해서 파악된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진정으로 사랑을 느끼는 권우빈이 불안함을 느끼는 것은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충만함 때문이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나의 피부까지 내어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피부까지 얻는 것을 원한다. 언제 서로를 떠날 지 몰라 불안해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안정된 사랑을 얻는 것은 그 정의상 불가능하다.
한편 윤수지는 불안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윤수지는 계획적이고 권우빈을 얻기 위해 아버지와 게임을 진행하지만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녀는 권우빈과 관련한 모든 일에 계획이 있다. 그렇다면 윤수지는 권우빈을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윤수지가 지속적으로 착용하는 ‘장갑’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듯 싶다. 웹툰에서 분명히 보여주 듯 장갑의 기원은 아버지이다. 윤수지는 아버지와 포커, 체스, 바둑을 할 때 장갑을 착용하며, 이후부터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착용한다. 윤수지에게 권우빈을 제외한 타인은 게임의 바둑말이지만, 권우빈만은 예외이다. 권우빈은 윤수지가 게임을 지속할 수 있도록 만드는 플레이어이기 때문이다. 윤수지의 ‘계획’은 사랑이 수반하는 불안함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다. 윤수지가 자신의 궤도에서 권우빈을 둘러싼 상황이 이탈하였을 때 드러나는 윤수지의 잔혹함은 (가령 권아영) 윤수지의 불안을 지시한다. 그녀는 권우빈을 얻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불안을 억제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랑이 아닌 것일까?
불안과 집착이 사랑을 위해 제거되어야 할 요소라는 보편적 인식과 달리, 이 웹툰은 불안과 집착만으로 사랑을 지시한다. 권우빈의 불안과 윤수지의 집착이 지시하는 바는 윤수지가 ‘진실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사실 이런 추악한 면모로 구성된다는 ‘사랑의 진실’에 가까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