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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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야기는 어떤 인과로 지금 여기에서 만나게 됐다" 윤홍 작가의 <마왕까지 한 걸음>

빼어난 세계관으로 더이상의 개연성이 필요없어진 작품

2023-12-11 주다빈

몇 해전에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사는 게 아주 힘들 게 느껴졌던 적이 있다. 그때 처음으로 무속인을 찾았었는데, 내게 해줬던 말에 도움을 받았다. ‘지금이 그냥 힘든 때야. 이건 사람이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냥 그런 때야. 근데 곧 지나갈거야. 그러고나면 훨씬 나아질거야.’. ‘그냥 그런 때’라는 이야길 들으니 지금까지 나락처럼 느껴졌던 삶이 웃기게도 괜찮아졌다. 나를  힘들게 했던 건 실패라는 사실보다 도저히 알 수 없는 실패의 원인을 찾으려던 마음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나를 많이 탓했고 내 존재를 의심했고 세상을 저주했다. 그런데 저 말을 듣고 나니까 그냥 그런 것을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면서 속 시끄러운 짓은 그만 두고 지금은 웅크리고서 앞으로 올 순간을 대비하고 있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내가 해야할 일은 거쳐갈 순간을 위해 지금을 꼼꼼하게 살아내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게 했음에도 내가 예상했던 결과에 닿지 못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나의 운이 타인의 운보다 강하지 않을 때, 나의 염원이 타인의 염원보다 약할 때이다. 그럴 때에도 크게 낙심하지 말고 지금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그리고 또 시간을 지나오다보면 원하는 것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마왕까지 한 걸음>의 세계관은 이 생각과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주인공 유리아는 침묵의 숲에서 최초의 용사 올라를 만난다. 그때 유리아는 ‘인과’를 언급하고 강한 인과를 가진 인물일수록 세계의 보호를 받는다고 한다. 만화 세계에서 흔히 말하는 ‘주인공 버프’라할 수 있다. 먼치킨류에서는 주인공이 가진 ‘인과’가 가장 강하기에 백전백승하는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마왕까지 한 걸음>에서는 스토리의 재미를 위해서 이 인과를 뛰어넘을 수 있는 존재를 설정해두었다. 성물로 불리우는 기구인데 이 중 하나인 ‘물병자리’를 유리아가 소유하고 있으며 덕분에 유리아의 인과가 상대적으로 약해졌고 현재까지의 이야기를 전개시킬 수 있게 한다. 종종 전투 과정에서 성물의 3개의 보석이 차례로 파괴되며 유리아의 인과가 순간적으로 제 힘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함께 있던 인물들은 유리아에 엄청난 공포를 느낀다. 즉 유리아가 세계관 최강자인 셈이다.

 인과를 중심으로 작가가 설정한 세계는 아주 거대하게 느껴진다. 특히 작품의 전개 순서에서 그 특징이 잘 느껴진다. <마왕까지 한 걸음>의 목차를 보면 동일한 타이틀의 회차가 연재되던 중 새로운 제목의 회차가 진행된다. 멈췄던 스토리의 제목은 몇 회가 지난 뒤 다시 등장해 그때의 이야기가 다시 진행됨을 알린다. 그러나 독자들은 제목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진행되는 것으로 느끼게 된다. 이 세계에 속한 각 인물의 인과가 작동하면서 서로 다른 인과와 접하고 또다시 흩어지면서 원인이 발생하게 되고 이에 따라 이전에 멈췄던 주제가 다시 움직이는 것처럼 말이다. 작가는 유려하게 짜낸 스토리로 서로 다른 인과의 흐름을 하나의 인과로 만나게 하고 또 그 과정에서 뿌려진 복선은 또 다른 스토리에서 거둬들이기도 한다. 덕분에 독자는 한 회, 한 회 집중하여 작품을 읽어야 하고 어떨 때는 복선을 놓쳐 재미를 즐기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런 작품의 재미는 의외의 장소에서 기존에 보았던 복선을 회수하는 것 자신이 놓치고 지나간 복선을 다른 독자에 의해 인식하게 되는 데에 있다.



강한 인과를 가진 유리아의 힘을 억제하는 물병자리의 파괴는 유리아 힘의 발현을 의미함과 동시에 유리아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유리아가 자신의 힘을 완전히 발휘하는 순간에 세계에 멸망이 찾아올 뿐만 아니라 자신 역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도록 얽힌 운명은 어쩌면 주인공이 없는 세계는 존재할 의미가 없는 웹툰의 인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유리아가 올라에게 말했던 것처럼 유리아의 업이 그 다음의 누군가에게 전해져 윤홍작가의 세계는 계속해서 이어질지도 모른다. 이미 정해진 모든 운명을 독자로서 담담히 받아드려야할 것 같다. ‘그냥 그럴 수밖에 없는 세계’니까. 뛰어난 스토리 전개 방식과 시원한 전투씬 그리고 중간 중간 등장하는 개그씬까지 몇 편 읽다보니 이미 이 작품에 빠져들었고 아직까진 이 인과보다 강한 인과를 만나진 못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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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다빈

만화평론가
2020 만화·웹툰 평론 공모전 신인부문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