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금발이 (멍청하다는건) 너무해
[ 그림 1, 영화 <금발이 너무해> ]
「그렇고 그런 바람에」에 관한 글을 시작하는 단어로서 가장 적절한 단어는 아마 ‘포스트-페미니즘’일 것 같다.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영미권에서) 1세대 페미니즘이 이룩한 여성 참정권 등의 성취를 이어받아 2세대 페미니즘(또는 radical feminism)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논의에 집중된다. 그 이후에 등장한 ‘포스트 페미니즘’은 ‘포스트’라는 단어에서 이미 보여주듯이 제2세대에 의해 남겨진 것들에 대해서 논의하기 시작한다. 제2세대 페미니즘에서 ‘여성성’은 여성 억압의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여성적인 것’들이 제거된 여성을 페미니스트 주체로서의 모델로 생산했다. 반면 포스트 페미니즘은 여성성을 억압하는 것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여성성’을 억압해야 한다면 그것 또한 여성 혐오로 귀결된다는 것을 지적하며 여성성을 보존하고, 여성성을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로서 수용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성 해방이라는 논조가 전개된다. ‘금발은 멍청하다.’는 편견을 대항하기 위해서 금발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이다. 금발이 ‘괴로워’하는 이유는 금발이어서가 아니라, 금발이 멍청하다는 편견 때문이라는 것이다. 매력적이고 화려한 외모를 소유한 여성 주체를 제시하는 모습은 「금발이 너무해」, 「섹스 앤더 시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등과 같은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성성’은 사회에서 여성을 비하하기 위한 도구이면서 여성에게 이중-억압에 시달리게 하는 원인이라는 입장과, 포기할 필요가 없는 페미니즘의 효과적인 도구라는 화해할 수 없는 두 입장은 페미니즘 진영 내에서도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1. 이상한 분홍색 여자애
[ 그림 2, 1화 내용 중 ]
회화과 불륜녀. 시끄러운 소문이 많은 화려한 복학생. 오바람에게 붙은 자극적인 수식어들은대체로 그녀의 과거 행적과 외모에 대한 편견에서 출발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분홍색’으로 칠한 것처럼 보이는 오바람의 외양은 마치 (사회에서 규정된) 여성성을 온몸으로 체화한 사람의 그것처럼 보인다. 오바람은 자신을 둘러싼 소문을 정확히 인지하면서도 동시에 지나치게 낙관적인 태도(‘나 자해녀로 유명하잖아.’ 등과 같은 농담)로 일관한다. 비록 그 오바람의 불륜은 김상남 교수의 결혼 사실을 몰랐다고 해도, 교수와 제자의 비밀 연애가 ‘제정신 박힌애’가 할 짓은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그러나 오바람은 교수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다소 무거운 소문에도 ‘가벼워’ 보이는 이모티콘과 오타들로 자신의 SNS에 해명을 게시한다. ‘가벼움’은 오바람을 규정하기에 동원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들이다. 오바람은 시끄럽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며, 낙관적이고, 화려하고 따라서 전체적으로 ‘가볍다.’ 오바람의 행실은 ‘가볍’고 ‘이상’하며, 지나치게 유머스럽다.
2. 핑크빛 선함
[ 그림 3, 49화 내용 중 ]
오바람의 가벼움은 동시에 이상할정도로 끈질긴 선함의 원인이다. 오바람은 사람에 대해 깊이 분석하고 판단하지 않고, 그렇기에 끊임없이 다정하게 군다. 오바람이 자책하듯이 ‘사람을 너무나 쉽게’ 믿어서 생긴 불륜 사건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행동한다. 물론 ‘다정함’이 브랜딩의 캐치 프레이즈가 된 이래로 ‘다정함’에 대한 선호는 현실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유해함’을 소거하고 있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오바람의 다정함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자신을 몇 달 동안 괴롭힌 김지원과의 싸움에서 같이 떨어져도 깨질까 무서운 ‘신주단지’처럼 끌어안는 오바람의 ‘선함’은 오바람이 가진 가장 큰 힘이다.
오바람을 묘사할 때 자주 사용하는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여성성’을 강조하는 브랜드이다. 분홍색과 화려한 복장, 따라서 ‘가벼움’은 오바람을 가볍게 재단하는 원인이 되지만, 오바람이 괴로운 것은 그러한 재단 때문이지, 분홍색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오바람에게 감화된 남자 캐릭터들이 오바람의 ‘분홍색’에 의해 감화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너무나 과도한 해석일까? 적어도 ‘분홍색’이 오바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이자 가장 단순한 의미에서 ‘취향’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