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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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념으로서의 엄마들, 마영신 작가의 <엄마들>

마영신은 우리내의 기호적 엄마를 연상시키는 텍스트와 정념을 분출하는 육체로서의 이미지를 충돌시킨다

2024-01-12 이선인

작 중에서 주인공 소연의 친구 명옥은 남편 몰래 나간 나이트에서 세 살 연하 남자를 만나 ‘첫 연애’를 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직전 페이지에 묘사된 남편과의 결혼 전 만남은 연애가 아니라는 걸까? 그럼 이런 질문은 어떨까. ‘엄마’와 ‘연애’는 어울리는 단어쌍인가? 마영신의 <엄마들>은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만화의 제목은 ‘엄마들’이지만 작품의 내용은 온통 그들의 정념에 찬 연애담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엔 우리가 통상적으로 상상하는 ‘엄마’는 없다. 이곳의 엄마들은 일하고, 놀고, 사랑에 몸바치고, 상처입고, 울고, 싸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소위 ‘노는 엄마들’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캐리커처에 지나지 않는가? 글쎄, 마영신의 마법은 그렇게 단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이 작품에 대해 가장 쉽게 내릴 수 있는 평가는 이것이야 말로 ‘사실주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이야말로 진짜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며 우리가 보편적으로 떠올리는 ‘엄마’라는 기호는 구성적으로 조작된 것이라는 평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 역시 앞서 말했던 ‘우스꽝스러운 캐리커처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이 두 개의 시각은 모두 어떠한 원본성을 찾으려 한다는 면에서 크게 다른 접근이 아니다. 마영신의 <엄마들>이 독특한 이유는 그것이 엄마의 진실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엄마’라는 인간 군상으로부터 특정한 사실들만을 집합시켜놨다는 점이다. 마영신은 마치 이 만화에 등장하는 엄마들을 충동으로 가득찬 2~30대 처럼 그려놓는다. 우리가 엄마=어른이라고 여기는 단어와 함께하는 맥락들, 세심함이나 사려깊음의 표정들은 잘 등장하지 않는다.

만화는 결국 칸이라는 조각들의 모음이다. 그것이 인터뷰를 기반으로 하였든, 아니면 누군가의 상상으로 비롯되었든 결국 최종적으로는 개별로 존재하는 이미지들을 하나로 편집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만화가 그리는 현실은 선별의 현실이다. 그렇기에 마영신이 그리는 엄마들이 ‘엄마’라는 보편적 기의를 지니지 못한 존재들이라고 여기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이해다. 반대로 ‘이것이 진실’이라고 말하며 엄마의 기의를 바꿔넣자는 요구 역시도 어색하긴 마찬가지다. 결국 이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이미지는 마영신이라는 작가의 선별에 의해 만들어진 표상이기 때문이다.

마영신이 그리는 것은 차라리 그 모호성이다. 이 등장 인물들이 우리가 아는 ‘엄마’라는 기호로부터 탈각되었음을 감지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게 진짜 삶이라고 납득하게 되는 그 감각. 마영신은 언제나 전형적인 표상을 사용하는 듯 하면서도, 인물로 대표되는 스테레오 타입들을 흔들어 놓는다. 마영신이 진짜로 현실을 그리고 있다면 그 결과물은 그가 직접 드러내는 직관적 표상물들이 아니라 그 표상들로 인해 흔들리는 우리의 감각이다. 마영신은 세상의 사람들은 기호가 아니라 모호함의 집합이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잘 아는 작가이다.

따라서 마영신이 ‘엄마’와 ‘연애’라는 단어를 붙여놓았다는 사실이, 우리가 이 두 단어간의 거리를 극단적으로 먼 것으로 느끼고 있음을 드러낸다. 마영신이 드러내고 있는 건 바로 엄마-연애라는 단어가 상존할 때 우리가 불편함을 느낀다는 사실에 다름이 없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성애라는 정념이 없는 삶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특정한 대상들에게서 그러한 개념을 삭제한다는 것은 그들로부터 정념을 빼앗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마영신이 <엄마들>에서 주요한 사건들을 다 연애의 부산물들로 그려낼 때, 그러니까 사랑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뺏고 욕하고 싸우고 용서하는 것들로 채워넣을 때에 그것이 생의 하나의 조건이며 일부라는 사실이 더욱이 명백해진다. 따라서 서로 연결되지 못할 것이라 생각되던 두 단어, ‘엄마’와 ‘연애’의 연결을 이루어낼 때에 오히려 ‘엄마’라는 단어는 더욱 강력한 생의 단어가 된다.

주인공 소연은 ‘사랑의 1차전’ 에피소드에서 자신의 연적인 꽃집 여자와 격렬한 몸싸움을 벌인다. 이때 공간의 감각은 흑색으로 둔화되고, 모든 사운드는 일체 작동을 멈춘다. 그리고 하나의 내레이션만이 떠오른다.



‘20대 때 철들었으면 이렇게 안 살지. 허무하게 빚 갚다 인생 다 됐네.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올바르게 살면 복 받겠지. 거짓 없고 남 헐뜯지 않고 덕을 쌓으면 그게 자식한테 좋은 일이다. 나이 들수록 자식밖에 없는 거 같다. 행복을 모르고 감사를 못 느끼면 그게 불행이지. 건강한 신체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 되고 마음을 비우고 남을 배려하다 보면 자연히 행복은 찾아온다.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지. 행복은 가까이에 있다. 옛날부터 이런 걸 생각하면서 살았다면 지금은 더 행복했을 텐데… 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을까…’


마영신은 우리내의 기호적 엄마를 연상시키는 텍스트와 정념을 분출하는 육체로서의 이미지를 충돌시킨다. 이것은 우리의 가치를 대변하는 텍스트를 기반으로 무참한 육체의 향연을 조롱하기 위한 배치인가? 그렇게 보기엔 이 육체들은 지나치게 역동적이며 충만한 에너지의 집합처럼 보인다. 이 탄식의 술회와 충동의 행위는 동일 선상에서 충돌한다. 마영신은 어느 쪽으로도 가치의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보편적 가치에 함몰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마영신이 정의하는 모호성의 순리를 받아들일 자세가 되었다면 이 광경은 확연히 달리 보일 것이다. 보라, 이 약동하는 생의 육체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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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인

2017년 신인만화평론 공모로 만화평론가로 등단, 2022년 GG 게임 비평 공모로 게임평론가로 등단하였다. 영화를 전공했으며 평소에는 만화, 게임, 영화에 관한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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