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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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잘하는 개는 없어" 갬쟈 작가 <개같이 탈출>

인간이 없는 세상에서 속, 뜻밖에 견생드라마

2024-01-16 박민지


| 처음부터 잘하는 개는 없어.

‘좀비’는 핫하지 않지만, 여전히 수요 있는 소재다. 한때 인간이었으나 이종인간이 된 이 가련한 존재는 뇌를 으깨거나 목을 베어야 영면한다. 질주하고 물고 매달리는 것, 그것은 흡사 개와 같다. 지난 8월부터 네이버웹툰에서 연재 중인 갬쟈 작가의 만화 <개같이 탈출>은 ‘괴물 좀비 개들이 우글거리는 고립된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광견병을 연상시키는 ‘좀비 개’의 등장은 인간의 속도를 뛰어넘으며 이빨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어서 보다 위협적이다. 내 딸이 좀비 바이러스에 걸린 ‘좀비 딸’의 변주일까? 그렇다면 ‘좀비 개’는 구제역에 걸린 돼지나 럼피스킨에 걸린 소처럼 인간 손에 일찍이 멸종했을 것이다. 만화 <개같이 탈출>엔 (아직까진) 인간 좀비가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도 개, 적대자도 개다. 


| 인간이 없는 세상에서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그 땅에 사는 모두를 몰아내고 만다. 인간사 갈등은 차치하고, 사람이 더는 살 수 없는 공간엔 이들이 키우던 동물들이 남아있다. 집도 잃고 보호자도 없이 떠도는 가축과 동물들, 그리고 이들을 돌보는 봉사자들의 이야기는 눈물겹다. 만화 <개같이 탈출>은 영문도 모른 채 가족을 기다리는 강아지 ‘삐용이’의 시점에서 출발한다. 삐용이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견종 ‘말티즈’다. 작고 귀엽고 사랑스런 외형에 위협감이 거의 없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삐용이는 기다림과 배고픔에 지쳐 홀로 현관 밖으로 나갔다가 인간이 사라진 세상을 마주한다. 무슨 이유로 떠났는지 모르지만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나를 두고 간 게 피할 수 없는 팩트다. 가족이 세상 전부인데 세상이 사라졌다니, 삐용이를 보고 있으면 연민을 자아낸다. 어리둥절한 삐용이에게 나의 반려동물이 투영되며 나 없는 너의 모습을 상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어쩌면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예습하는 공포, 명백한 희생자가 전달하는 긴장감, 그것이 독자로부터 도출하려는 감정이라면 만화 <개같이 탈출>은 성공했다.

전지적 소형견 시점

삐용이는 사람의 필요로 만든 계량 종이다. 몸무게 5kg도 되지 않는 소형견. 너무 짖어도 안 되고 사나워도 안 된다. 사람 말귀 알아듣고 애교도 많다. 그런 면에서 삐용이는 완벽한 반려견이었다. 스스로 사회성이 없다고 할 만큼 다른 개들과의 생활은 적응하기 버겁다. 크고 강한 개들이 서열 다툼을 하고, 한정된 먹이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을 소환시킨다. 다행히 삐용이에게 속 깊은 갈색 푸들 ‘보리’, 냉철하고 영리한 시베리안 허스키, 어쩌다 탈출 길잡이가 된 토종견 ‘봉구’ 등 동료가 생기지만 이들에게 인정받기는 쉽지 않다. 좀비 개에게 공격당하기 전에 이들에게 버림받지 않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다. 그러나 삐용이는 아는 것도 눈치도 없다. 게다가 생존을 위협하는 실수를 하는 소위 폐급이다. 아직 극 초반이라 삐용이의 성장폭은 가늠할 수 없지만 주인공으로써 삐용이에 대한 기대감이 줄어드는 건 사실이었다. 가장 낮은 위치에서 늘 올려다봐야 하는 삐용이의 시점은 그래서 더 서글프다. 같은 아포칼립스물이라도 이야기릐 결말을 알고 움직이는 ‘김독자’는 얼마나 유리한 입장인가? 


| 뜻밖에 견생드라마

만화 <개같이 탈출>은 삐용이가 탈출하는 과정이 웃긴 상황과 심각한 상황과 어우러져 완급을 조절하고 탄탄한 작화와 박진감 넘치는 액션 연출 등 만듦새가 상당히 훌륭하다. 또한 삐용이가 이동하며 만나는 개들은 각자 사연과 목표가 있고 나름 최선을 다해 인간이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 다양한 견생 이야기는 삐용이의 서사와 별개로 수단화되기에 십상인 조연 캐릭터들에게 존재감을 주며, 이야기를 풍성하게 한다. 인간 캐릭터가 없다는 건 어쩌면 이야기 설정상 핸디캡일지도 모른다. 개들의 이야기만으로 극을 끌고 가는 것은 분명 더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지만, 만화 <개같이 탈출>을 감상해보면 약점에 이 작품만의 개성이자 강점이 되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삐용이가 언니를 만나는 시점, 즉 탈출보다 탈출 너머의 이야기가 삐용이에게 더 가혹할지도 모른다. 삐용이의 모험은 이제 막 시작했다.


필진이미지

박민지

만화평론가
2021 만화평론공모전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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