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추락을 이동수단 삼기, <플레이어>

주인공의 모습은 흡사 말 한마디로 나락에 가버리는 최근 세태를 대변하는 듯 하다

2024-02-20 수차미


* 작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플레이어>를 장르적으로 정의하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책빙의와 탑등반물, 이중 전자는 웹툰을 보던 주인공 ‘허설진’이 연재 플랫폼의 댓글란에 글을 썼다가 신 ‘아서’의 선택을 받아 웹툰 속 세계로 넘어왔다는 설정이 있다. 장르로 풀기엔 좀 모호하지만 이야기의 중반에 접어들면서 이 설정은 모종의 복선으로 회수됐다. 그건 바로, 웹툰 속 세계가 현실의 대안으로 설계된 게 아니라 나란히 병치된 이세계에 가깝다는 점이다. 작중 설명에 따르면 현실에서 처리할 수 없는 것들을 처리하는 곳이 바로 천공성이며, 이는 곧 배치상에서 현실의 하위 단계로 천공성을 둔다. 천공성은 마치 <총몽>의 고철마을처럼 허설진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희생하고 있던 셈이다. 즉 운동적인 면으로 보면 이렇다. 기존의 이해가 평행우주라는 점에서 수평적이라면, 밝혀진 설정은 이세계라는 점에서 수직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때 두 세계가 서로 동등하지 않다는 점에서 귀인하는 몇 가지 단서를 얘기해볼 수 있게 된다.


우선 한국에서 탑등반물이 신자유적 상황에 따라 발흥했다는 점을 떠올릴 수 있다. 적확하지는 않지만 일단은 이렇게 써보려 한다: 수행체계와 보상을 결합해 만들어진 시스템에서 직업을 갖고 ‘탑’을 오른다는 점은 삶의 단계적 수행과 그에 따른 성과를 공유하는 사회 분위기와 관련 있다. 이는 다시금 탑이 있는 곳이 이세계인지 아니면 현실세계인지로 나뉘는데, 2010년대가 전자에 가까웠다면 2020년대에 들어서는 후자로 이동한 경향을 보인다. 소위 말하는 세계의 개변이 일어나버려, 판타지 세계가 현실에 융합되어버리거나 하는 식의 이런 영향은 VR과 같은 증강현실의 상상력에 폐허에 맞서 싸우는 임전무퇴의 성격이 결합한 것이다. 2010년대 중반을 휩쓸었던 헬조선 담론은 아무리 논해봐야 지배적인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점이 있었고, 이를 따라 유행했던 ‘이세계물’은 도피에 따른 쾌감보다 꿈에서 깨어날 때의 상실감이 더 컸다. 그런고로 이들은 도피보다 현실에 남기를 택했다.


<플레이어>는 전자로 시작해서 후자로 이동한다. 처음에 만화는 빙의물의 형태로 출발해 판타지 세계로 이세계 전생해버린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며, 전생의 특전으로 능력을 부여받는 것까지는 동일하다. 동료를 만나 능력을 키우고 집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는 일이 이런 이야기의 주된 플롯이다. 하지만 모험을 진행하며 동료와 유대를 쌓고, 이들 세계가 주인공의 현실을 위해 희생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면 여기서 객관적 현실을 논하기란 힘들어진다. 자신의 세계가 사실은 다른 한 세계의 희생으로 지탱되었고, 이들 간은 서로 동떨어진 게 아니라 손쉽게 교류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 A를 위해 B를 희생하는 일은 도덕적 딜레마의 품 안에 들어온다. 이를테면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이 영화는 ‘한때 자신이었을지도 모를 ‘나’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세계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플레이어>는 ‘우리’의 범주를 재정의하면서 지배적 현실에도 재연결된다. 


작품은 무료한 학교생활에서 1등이 되고 싶은 소년의 욕망으로 시작하지만 웹툰 세계의 신인 ‘아서’는 그런 허설진의 몸을 빌려 현실에 강림하고 싶어한다. 허설진이 현실에 남고 싶어한다면 아서는 그런 현실을 떠나고 싶어하며, 이는 둘 사이에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있음을 드러낸다. 허설전이 천공성과 현실을 하나의 수직적 관계로 이해한다면 신인 아서는 이 둘 사이를 수평적 관계, 대등하게 이해한다. 결국 이 작품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제목과 설정에서 ‘플레이어’라는 게임 판타지의 장르적 설정을 가져오지만, 사실은 그런 설정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현실은 수평이 아니라 수직이기에 추락하거나 상승하는 것 말고는 이동 수단이 없다. 추락은 비가역적이며 세이브 앤 로드는 현실 세계에서 적용되지 않는다. 이 경우, 어딘가로 도피하는 것보다는 추락해버렸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고 그런 점에서는 말 한마디로 나락에 가버리는 최근 세태가 떠오르기도 한다. 1화의 허설진처럼 말이다. 


필진이미지

수차미

< 만화평론가> 
* 2019 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상 신인 부분 
* 2019 한국예총 평론상 영화 부문
* 2020 서울시립대 영화평론 공모전 대학원생 부문
* 2024 부산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
* 저서 『안녕하세요 오즈 야스지로』,『포스트 시대의 영화 이미지』


관련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