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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음투성이의 사람들 <사랑에 서툰 사람들>

우리의 현실이 그러하듯 서로 다른 사랑에 대한 방식을 보여주는 작품 속 사람들

2024-02-23 박근형


김애란 작가의 소설집 『바깥은 여름』 중 단편소설 「가리는 손」에서, 부모의 이혼 사유를 묻는 아이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답한다.


어른들은 잘 헤어지지 않아. 서로 포개질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하는 게 반드시 이별을 의미하지도 않고. (…) 그래도 어떤 인간들은 결국 헤어지지.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안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날 수 없는 거야. 맹렬한 속도로 지구를 비껴가는 행성처럼. 수학적 원리에 의해 어마어마한 잠재적 사건 두 개가 스치는 거지. (…) 그렇지만 각자 내부에 무언가가 타서 없어졌다는 건 알아. 스쳤지만 탄 거야. 스치느라고. 부딪쳤으면 부서졌을 텐데. 지나치면서 연소된 거지. (…) 어른이란 몸에 그런 그을음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구나(1).


그에 따르면 누군가와 누군가의 만남과 헤어짐은 두 개의 행성이 비껴가는 정도의 거대한 사건이다. 각자의 기억, 관계, 경험, 가치관, 생각, 모든 것이 ‘서로 고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결코 닿을 수 없음에도, 닿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가까이 스쳐가는 바람에 어딘가를 다치고, 무언가를 잃고, 그렇게 서로에게 그을음이 남는다. 그렇다면 차라리 밀어내 버리면 될 텐데, 우리 내부에는 자기자신에게 향하는 중력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끌리고 끌려가는 인력도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일 테다. 이 관계가 둘뿐이 아니라 셋, 넷, 그 이상이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다 온통 그을음투성이가 되는 일, 그것을 마침내 살아내는 일이라고 부르는 지도 모르겠다.


하이메 에르난데스의 『사랑에 서툰 사람들(Love Bunglers)』에는 온통 그을음투성이인 사람들이 살고 있다. 『사랑에 서툰 사람들』은 에르난데스 형제가 1981년부터 제작해온 연작시리즈 《사랑과 로켓(Love and Rockets)》의 대표작이며, 《사랑과 로켓》의 오랜 여주인공인 매기의 삶을 압축하였다. 국내에는 쪽프레스에서 2020년에 『사랑에 서툰 사람들』만 번역되어 발간되었으나, 『사랑에 서툰 사람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서사의 충분한 완결성을 지닌다.

『사랑에 서툰 사람들』은 매기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지만, 모든 사건과 진상이 매기의 시점에서 파악되지는 않는다. 인물과 사건은 직물의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듯이 직조되지만, 닿지 않고 스쳐갈 뿐이다. 이렇게 서로의 중력이 만든 ‘의도치 않은 어긋남’들은 때로는 상실과 비극을 불러오고, 비극은 더 큰 비극을 불러온다. 

이를테면 매기의 남동생 캘빈은 다른 가족 구성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동네 형의 반복되는 성폭행을 견뎌내지만, 끝내 그는 불행한 방향으로 성장하고 가족에서 이탈하여 부랑자가 되고 만다. 그는 방랑하며 살아가면서도 ‘누나들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으나 정작 매기가 작중 내내 캘빈을 알아보지도, 마주치지도 못한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주요 인물인 매기와 레이, 캘빈의 어긋남은 책의 마지막 챕터에서 대단원을 맞이한다. 매기의 꿈이 좌절된 상황에서 매기와 레이는 서로에게 달려가려 하지만(2×4컷으로 분할된 103p에서, 하이메 에르난데스는 왼쪽 4컷은 매기, 오른쪽 4컷은 레이의 행동에 할애하여, 지면에서의 인물 캐릭터 간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도록 표현함으로써 심리적 거리 또한 가까워지고 있음을 연출하였다), 그 과정에서 레이가 평생 성폭행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제정신이 아닌 상태의 캘빈을 도우려다 상해를 입는 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이후 p.106-107에서는 왼쪽 면에 매기, 오른쪽 면에는 레이의 인생에서 그들이 함께했던  순간들이 각각 배치됨으로써, 독자는 레이의 생사를 알 수 없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의 역사라는 거대한 사건이 어떻게 스쳐지나가고 그을음을 남겼는지를 목도한다. 이 마지막 어긋남이 봉합되기까지는 2년 이상의 세월이 소요된다. 매기는 “당장 어떤 관계를 시작할 준비가 안되었다(2)”고 주장하며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관계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매기는 레이가 거의 불구가 되고, 또 차량 정비소를 매입해서 운영하겠다는 그녀의 꿈이 좌절된 현실 속에서도, The Comics Journal에 게재된 Dan Nadel의 <THE BEST: JAIME HERNANDEZ’S “THE LOVE BUNGLERS”>의 표현을 따르자면, 그녀는 “마침내 무언가를 붙잡(finally holding onto something)(3)”기로 한다. ‘무언가’는 ‘누군가(레이)’다(“That something is also a someone: Her longtime off and on lover, Ray Dominguez.”). ‘무언가를 붙잡는다’는 말은 레이의 ‘곁에 남기로’ 한 것보다, 그와 ‘함께 하기로’ 한 것보다 매기의 능동성을 강조한다. 관계에 대해 다소 모호하고 불확실한 태도를 보였던 매기는 마침내 어긋남 자체를 수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긋남 때문에 돌고 돌아왔지만, 그 어긋남 때문에 레이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으므로.


『사랑에 서툰 사람들』의 사람들은 나름의 방식대로 애정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모두가 성공적이지는 않다. 누군가는 용기를 내지 못하고, 누군가는 너무 이르게 죽었으며, 누군가는 차마 고통을 나눠줄 수 없어 고난의 길을 걷는다. 우리의 현실이 그러하듯, 작품 내에서도 각자에게는 각자의 진실만이 존재할 뿐이므로, 오직 독자만이 매기의 인생을 둘러싼 직조물을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권능을 부여받은 셈이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놓인 중력과 존재 방식 때문에 삶에서의 어떤 비극들-어긋남들이 불가피하고 불가역적인 운명 같은 것이라면, 사랑에 있어서의 우리의 서툶 역시 어찌할 수 없는 일이겠다. 그렇게 『사랑에 서툰 사람들』은 스치고, 그을리고, 잃어버리면서도, 사랑하기를 포기할 수 없는 안타까운 우리를 더할 나위 없이 충실히 그려내고 있다.


(1) 김애란. (2017). 바깥은 여름. 문학동네. p.213-214.

(2) 하이메 에르난데스.(2020). 『사랑에 서툰 사람들』. 쪽프레스. p.68.

(3) Nadel, D. (2011, October 17). THE BEST: JAIME HERNANDEZ’S “THE LOVE BUNGLERS”. The Comics Journal. https://www.tcj.com/he-broke-into-your-house-jaime-hernandezs-the-love-bungl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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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형

‘좋음’을 다정함을 담아, 적확하게 쓰고 싶습니다.

2017 디지털만화규장각 신인만화평론 공모전 가작
2018 제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감상문 공모전 가작
2018. 6. ~2019. 1. 디지털만화규장각 만화웹진 만화리뷰 연재
2019 한국만화박물관 소장자료 연구 필진 참여
2021 제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감상문 공모전 대상
2023 전북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재학 중
2024 대한민국만화평론공모전 최우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