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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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 <지미 코리건>

-친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사건이 상징하듯- ‘함께’의 실패에 대한 이야기에 할애되어 있다

2024-03-01 박근형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는 신생 도시 시카고가 펼치는 아메리칸드림 그 자체이자, 1871년 시카고 대화재 극복의 상징이기도 했다. 위풍당당한 ‘백색 도시(White City)’는 신고전주의 양식을 채택한 흰 건물로 가득한 박람회의 별칭이었다. 미국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박람회장, 그 가운데서도 “세상에서 가장 큰 건물의 바로 맨 꼭대기”에서, 10살 생일을 맞은 지미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 


『지미 코리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이하 『지미 코리건』으로 약칭)이 다루고 있는 주제의 층위는 복합적이고 다양하다. 그중 한 층위는-친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사건이 상징하듯- ‘함께’의 실패에 대한 이야기에 할애되어 있다. 『지미 코리건』의 주요 등장인물은 100년간 4대에 걸쳐 이어지는 남성들(증조할아버지-할아버지 ‘지미’-아버지-현대 ‘지미’)이다. 이 중, 19세기 후반과 20세기 후반, 2명의 지미의 이야기가 중심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비선형적으로 진행된다.

현대의 지미는 어느 날 갑자기, 어렸을 때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떠났던 친아버지에게서 연락을 받는다. 그는 궁금함에 아버지를 만나기로 마음먹지만 어머니 없이 성장한 할아버지 지미에게 어머니라는 존재가 ‘상상에 근거해 수립된 정체성’이자 ‘여러 여자들에게서 가져온 애매한 관념’에 불과했듯, 현대의 지미에게도 아버지는 미지의 대상에 불과하다. 이러한 아버지에 대한 인식은 ‘어머니와 관계하고 내 의지와 관계없이 삶에 개입하는 타자’에 불과하며, 혹시 살인범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으로도 확산된다. 결국 30년 이상 단절된 관계는 끊임없는 소통의 시도와 실패로 재현된다. 아버지는 관계의 회복을 원하지만 지미가 대답을 유예하는 사이, 아버지는 교통사고를 당한다. 아버지가 재혼하여 입양한 딸 에이미와, 할아버지 지미를 만난 지미는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에이미에게서 가족애를 경험하고 마침내 아버지를 용서하고 관계를 회복할 용기를 낸다. 그러나 어려운 결심을 한 보람도 없이 아버지는 사망하고, 에이미와의 관계도 그대로 끝나버리고 만다.

 『지미 코리건』은 현대의 지미의 여정에 할아버지 지미의 이야기가 비선형적으로 개입하는데, 편부의 학대 속에서 자란 지미가 아버지에게 버림받기까지의 과정이 만국박람회의 개최 과정과 맞물린다. 현대의 지미의 에피소드에서는 실패로 인한 외로움의 정서가 느껴진다면, 19세기의 지미의 에피소드에서는 소외로 인한 우울함의 정서가 좀 더 강하게 묻어 나온다. 


2명의 지미에게는 타자가 끊임없이 틈입하지만, 그들은 각자의 결핍으로 유대에 성공하지 못하고 항상 실패한다. 19세기 지미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외로움이(모두 편부의 학대와 방임의 결과물이다)을 같은 반 소녀에게, 자신이 그리던 이상적인 아버지의 모습은 이탈리아계 친구의 아버지에게 투영하지만, 지미의 타자를 향한 애틋한 시도들은 항상 실패로 돌아갈 뿐이다. 

한편 현대의 지미의 부성에 대한 결핍은 작품의 프롤로그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슈퍼맨이라는 대중문화 아이콘으로 기호화되고 은유된다. 그러므로 친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연락을 받은 순간, 아버지와 동일시되면서 동시에 대체되는 상징이었던 슈퍼맨(의 분장을 한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는 것은 필연적인 수순일 것이다. 친아버지의 실재를 확인했으므로, 대체는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초인인 슈퍼맨이 갖는 ‘상승’의 이미지는 고층 건물에서의 ‘추락’과 극적인 대비 효과를 불러오는데, 『지미 코리건』에서 ‘상승’과 ‘추락’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표상이다. ‘상승’은 19세기의 지미가 친어머니의 것인지 확신치 못하면서도 ‘밧줄이라도 되는 양’ 매달리는 주홍색 머리카락과,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처음으로 느꼈던 가족애 비슷한 감정이 유지되길 바라는 마음을 투영한 등잔 불빛, 박람회장 지붕으로 올라가는 길 등으로 표상되며, 희망과 애정, 기대감 등의 정서를 반영한다. 반면 ‘추락’은 19세기 지미가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나서 그것을 추락의 형태로 꿈을 꾸는 장면과, 결말부에서 지미가 슈퍼맨이 추락했던 자리를 들여다보고, 다시 고층건물 꼭대기를 올려다보는 장면이 슈퍼맨의 죽음 장면과 동일하게 극적인 대비 효과를 유발하며, 우울감과 외로움에 관한 정서를 강화한다.


클라이맥스에서 결말까지 『지미 코리건』은 다소 무겁게 진행되는데, 에필로그에서 또다시 지미에게 타자가 틈입한다. 지금까지 실패만 거듭했던 관계와는 달리, 그는 슈퍼맨의 추락을 목격했던 바로 그 위치에서 자기 자신의 추락을 상상하고 있는 지미에게 손 내밀어 주는 타자다. 두 사람의 짧은 대화로 『지미 코리건』은 끝을 맞이하지만, 슈퍼맨이 된 지미가 어린 날의 지미를 안고 날아오르는 엔딩 장면은 다소 희망적인 해석의 여지가 있다. ‘나만 끼면 항상 엉망’이 되는 것이 고통스럽고, ‘그저 남들과 잘 어울렸으면’하는 소망이 다였던 지미의 자기 화해의 가능성과, 스스로 아버지와 동일시했던 슈퍼맨이 되어 어린 자신을 구한다는 것은 지미가 아버지의 결핍을 완전히 극복하고 나아갈 것이라는 가능성으로도 읽을 수 있겠다. 


희망적인 가능성을 비치는 엔딩에도 불구하고, 『지미 코리건』의 작중 거듭되는 ‘함께’에 대한 실패는 강한 우울감과 외로움에 관한 정서를 야기한다. 이는 주인공인 두 지미에 대해 내러티브의 수용자(독자)에게 연민이라는 감정을 일으키고, 연민은 공감을 통해 작동한다. 레슬리 제이미슨은 공감에 관한 에세이집인 『공감 연습』에서 “고통의 근원이 아니라 고통에 관한 사실을 믿을 때 그것을 공감이라고 한다면 잘못된 것일까(1)” 반문하였다. 그 말을 나는 공감은 고통의 원인에 대한 동의가 아니라, ‘그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일이라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독자는 두 지미에 대해 ‘그들의 마음이 어떠하다는 것’을 믿는 방식으로 공감한다. 19세기의 지미가 만든 말 장난감이 주물이 엉망으로 되었을 때의 장면으로 돌아가 본다. 지미는 그를 무시하고 놀리는 친구들에게서 뛰쳐나와 (말의 형체라고는 알기 어려운) 장난감마저 눈 밭에 던져버리는데, 그래놓고 그것을 정말로 잃어버릴까 봐 바로 달려가 눈밭을 헤집고 울면서 잘못했다고 빈다. 이때 독자가 믿는 것은 사건의 인과관계가 아니라, 엉망으로 만들어진 장난감이라도 부여잡고 빌어야할 만큼 지미의 마음이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고통은 주관적인 감각이기에 타인과 근본적인 공유가 불가능하므로, 결국 외로움을 낳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고 공감이란 제3자의 자기 합리화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두 명의 지미의 아픔에 공감할 수밖에 없고, 작품 이후의 그들의 삶을 상상하게 되는 것은 『지미 코리건』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형태로 외로움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미 코리건』의 다음이란 없겠지만, 작품에서 그려지지 않은 시간과 시간 사이에, 혹은 엔딩 이후에는 ‘함께의 실패’가 아닌, ‘실패해도 좋은 함께’에 다가서는 지미를 조용히 그려본다.


(1) 레슬리 제이미슨(2019). 공감 연습: 부서진 심장과 고통과 상처와 당신에 관한 에세이(오숙은, 역). ㈜문학과지성사.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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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형

‘좋음’을 다정함을 담아, 적확하게 쓰고 싶습니다.

2017 디지털만화규장각 신인만화평론 공모전 가작
2018 제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감상문 공모전 가작
2018. 6. ~2019. 1. 디지털만화규장각 만화웹진 만화리뷰 연재
2019 한국만화박물관 소장자료 연구 필진 참여
2021 제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감상문 공모전 대상
2023 전북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재학 중
2024 대한민국만화평론공모전 최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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