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분한 무해함?
한 평론가의 지적처럼 ‘귀여움’은 분명히 귀여움의 대상을 ‘자신보다 위계적으로 낮은 위치에 둘 때만 가능’한 폭력을 내포하며, 위계적으로 낮은 위치를 ‘무해함’으로 변환시킨다. ‘귀여움’은 대상의 무해함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귀여워하는 주체의 권위를 드러낸다는 지적으로부터 이루어진 ‘귀여움’ 구출 전략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동시에 ‘무해함’을 따분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남겨진다. 무해함이 드러내는 바가 대상에 실질적으로 귀속된 속성이 아니라, 무해함에 대한 ‘욕망’이라면, 무해함은 그 자체로서는 따분한 개념일 수 있어도 ‘무해한 대상에 대한 욕망’은 따분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왜 무해한 대상을 욕망하는가? 아니 애초에 우리가 그것을 욕망하는 것은 맞을까?
안온, 다정, 무해, 연대에 집착하는 것에 피로감을 느끼는 소비자와 여전히 안온, 다정, 무해가 컨텐츠 시장의 매력적인 속성으로 여기는 소비자가 격렬하게 공존하고 있는 출판 시장에서 ‘무해함’은 논란의 한복판에 있다. 김병규 평론가가 영화 「너와 나」에 대한 (다소 공격적인) 평론의 문구를 빌려온다면 ‘무해함’에 대한 열광은 “관계의 복합적인 면모에 깊이 개입하는 성취로 향하는 대신 서로를 훼손하지 않는 안전한 세계에 속하고 싶다는 수동적 의지의 표명”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동시에 이와 같은 비판은, (무해함에 대한) 피상적인 관계에만 머무른다는 비판과 정확히 동일한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즉 무해, 연대가 피상적인 관계에만 머무르는 것에 그친다는 지적은, (무해와 연대를 마케팅 문구로 사용하는 업계만큼이나) 무해, 연대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고 있는 대중들의 상식에 의존하고 있다. 즉 양자는 정확히 동일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마루는 강쥐」
「마루는 강쥐」는 강쥐는 공개된 첫 화부터 밈이 생성될만큼 폭발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인간화된 동물이 로맨스가 아니라 돌봐줘야 하는 대상’으로서 ‘마루’는 직관적으로 귀엽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귀여운 강아지-인간인 마루는 ‘무해함’으로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루는 강쥐」가 지시하는 바는 ‘서로를 훼손하지 않는 안전한 세계’라기 보다는, 반려 동물에 대한 돌봄과 인간에 대한 돌봄의 층위는 같을 수 없다는 불쾌한 진실일 수 있다. 인간이 된 강아지로서 마루는 유치원을 가고 싶어하고, 떨어져 있는 것을 극도로 외로워한다. 이러한 감정 상태는 강아지도 느낀다는 즉각적인 반발이 가능하겠지만, 문제는 강아지들의 감정은 인간과 달리 외면하기가 너무나 쉽다는 것이다. 언어로의 의사 소통이 불가능한 대상으로서 강아지는 너무나 쉽게 인간에 의해 그 감정 상태가 왜곡되거나 인지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표현하는 어린이들과 달리 강아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또는 아픈 것을 표현할 수 없다.
자신이 어디가 아픈지조차 말할 수 없는 동물들을 자신과 평생을 함께할 ‘반려 동물’로 택한 사람들의 환상을 구현한 「마루는 강쥐」는 동시에 그러한 돌봄이 결코 쉬운일이 아님을 정확하게 묘사하기도 한다. 자신의 욕망과 불편함을 표현하지 못하던 존재가 그것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사랑’만으로 그것을 온전히 다 감내할 수 있을까? 「마루는 강쥐」에서의 주인은 그것을 훌륭하게도 수행하지만 그것이 모든 반려 동물의 주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마루는 강쥐」를 보며 즐기는 마루의 ‘귀여움’은 우리가 마루를 돌보지 않고 단지 관람해서일 수 있다. 누가봐도 유쾌할 뿐만 아니라 ‘귀엽고 무해한’ 「마루는 강쥐」를 ‘무해하게만’ 즐길 수 없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