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여명> :“대중의 클래식-화(化)*”를 생각하며
* 제목에 사용된 표현‘대중의 클래식화’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말을 인용한 것임을 밝힙니다.
1. 낯선 장소로 회귀하기, 그러나…
웹툰 <모스크바의 여명>은 황장미 작가의 동명의 웹소설을 만화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첫 화, 주인공인 이시윤이 사고를 당하고 타티아나의 몸으로 들어오는 대목에서 잠깐 멈칫했다. 이것도 회귀-물(回歸物)인 걸까?
물론 회귀물을 싫어하진 않는다. 몇몇 재미있게 본 작품도 있다. 다만 일부 작품에서 드러나듯 모두의 것인 미래를 자신의 전유물인 양 휘두르는 것이 어쩐지 온당치 않게 느껴졌을 뿐이다. 그랬기에 만일 <모스크바의 여명>이 미래에서 돌아온 한 주인공이 각종 피아노 콩쿠르에서 남들을 압도하며 망설임 없이 우승을 거머쥐는 얘기였다면 아마 다음 화를 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시윤-타티아나에게도 남들보다 유리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게 작품의 핵심은 아니다.
<모스크바의 여명>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타티아나라는 물리적인 한계(허약한 신체와 불량한 과거)이자 동시에 가능성(다치지 않은 두 손과 부유한 가정)에 놓이게 된 이시윤이 자신의 음악을 찾아 나가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성인 남성 피아니스트인 이시윤으로서의 경험은 앞서 말했듯 타티아나의 음악을 또래보다 성숙하게 만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마냥 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시윤의 음악과 지금의 타티아나가 할 수 있는 음악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타티아나의 몸과 이시윤의 정신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은, 한 미숙한 개인이 단순히 연주자로서 기술적으로 성장하는 모습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성숙해가는 모습 또한 함께 그려낸다.
2. 특정 분야를 다루는 만화로서의 탁월한 묘사
이번에는 조금 다른 얘기를 해보도록 하자. <유리가면>, <바텐더>, <슬램덩크>…. 일본 만화에서 주로 볼 수 있었던, 특정한 전문 분야를 소재로 한 성장 서사가 최근 들어 먼치킨 및 회귀의 유행에 힘입어 유수의 한국 작품(예를 들자면 <정년이>, <요리GO>, <가비지타임>, <중증외상센터 : 골든아워>나 <A.I. 닥터> 등이 있겠다)에서도 점차 보이는 것 같다(이러한 종류의 만화가 취향인 사람으로서 개인적으로 굉장히 반가운 일이다).
<모스크바의 여명> 또한 클래식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이들 계보에 속한다. 그리고 그들 작품이 그러하듯, 작품의 대상이 되는 소재를 탁월하게 묘사해낸다. 타티아나가 애착을 가진 쇼팽과 라흐마니노프가 주로 등장하지만, 이 밖에도 베토벤, 슈만, 리스트, 생상스 등 다양한 음악가가 인물의 성격이나 전개에 맞춰 언급되면서 각각의 음악가들만이 지닌 특색이 절로 익혀진다.
살짝 사견을 보태보자면 나는 스크롤을 내리는 내내 (역시 클래식을 소재로 한 일본의 만화인) <4월은 너의 거짓말>이 떠올랐는데 특히 에르네스트에게서는 안정적이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연주를 선보이는 아이자 타케시가, 그리고 아나스타샤에게서는 슬럼프를 극복하고 강렬한 연주를 선보인 이가와 에미가 떠올랐다. 조금 과한 해석일까? 덧붙이자면, 바이올린과의 막심 드미트리예비치 선배에게서는 아주 잠깐이지만 우리나라의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의 모습이 보였기에 여기 짧게나마 밝혀둔다.
3. 대중의 클래식-화(化)를 생각하며
끝을 맺으며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말을 인용해보려 한다. 인터뷰에서 클래식의 대중화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조심스럽게 ‘클래식의 대중화보다는 대중이 클래식화’되었으면 한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101화의 막심의 대답이 앞선 조성진과 같은 맥락에서 나온 답이 아니었을까 싶다. 비록 앞선 화에서 클래식이 더 편해져야 한다는 막심의 말은 클래식의 대중화를 지지하는 발언으로 읽힐 수도 있겠으나, 그가 결국 가진 것은 클래식 자체가 지닌 본질을 잃지 않고도 대중 또한 클래식을 사랑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밝히자면 나 또한 언제부터인가 클래식을 멀리했다. 어쩐지 재미없는 사람이 된 기분과 더불어 클래식이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감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부쩍 타티아나가 연주한 곡들을 찾아 듣는다. 올해 열린 평창 대관령 음악제도 예매했었다. 아쉽게도 일정이 겹쳐 취소해야 했지만. 그런 걸 보면, 분명 <모스크바의 여명>은 클래식의 본질을 놓지 않으면서도 적어도 하나 이상의 대중을 모으는 데 성공한 것 같다. 원작이 되는 웹소설은 올해로 완결이 되었으니 결말이 궁금한 독자라면 원작을 찾아 읽어봐도 좋겠다.
4. 부록: 함께 읽으면 좋은 책
혹 클래식에 관심이 생겼다면 함께 읽을 만한 책으로 <음악, 당신에게 무엇입니까(이지영 저/글항아리)>도 함께 추천한다. 앞서 언급한 조성진과 이외에도 여러 음악인의 인터뷰를 모아 실었는데, 클래식을 연주하거나 이외에도 활용하는 이의 입장에서 음악을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다. 다소 두꺼운 분량이지만 술술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