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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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끊는 복수의 방법 - <허무의 기록>

만화가 민지환이 세상을 향해 복수하는 방법

2024-03-06 문종필

『허무의 기록』 표지


민지환의 『허무의 기록』(2023)은 여러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훈」, 「살인자의 인터뷰」, 「최종적 형태의 가해」, 「박제가 된 천재」, 「체네렌돌라」가 그것이다. 이들 단편 모두 각자 나름대로 개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오래도록 기억나는 것은 「체네렌돌라」였다. 독자들의 경우, ‘체네렌돌라’라는 제목이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확인해보면 다음과 같다. 즉, “이탈리아 작곡가 조아키노 로시니가 작곡한 총 2막 구성의 오페라로 '체네렌톨라'는 '신데렐라'의 이탈리아식 표기”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민지환의 이 작품은 신데렐라를 모티브로 작품을 구성하였다. 그의 또 다른 단편 「박제가 된 천재」가 조선의 천재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이상의 삶과 작품을 모티브로 새롭게 재배치했듯이, 「체네렌돌라」 또한 이런 형식으로 재배치 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배치의 과정이 작가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조금 재미있는 의미로 웹툰 IP의 확장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같다고 할 수 없지만 ‘원작’의 숨겨진 의미를 확대하니 말이다. 


「체네렌돌라」는 가난을 끊는 복수의 방법을 섬뜩하게 그려 놓았다. 섬뜩함을 설명할 줄거리를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갚지 못할 빚을 떠맡게 되고 엄마 또한 병상에 누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버지는 사업 실패 후, 오래지 않아 죽는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은 먹고살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이 많은 짐을 혼자 짊어지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공부만이 유일한 희망이었기에 모든 것을 걸고 “모두가 바라는 정상”인 의예과에 당당히 합격한다. 하지만 많은 빚을 갚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높은 의대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홀로 떠돌게 되고 끝내는 ‘좋은 곳’에서 몸을 팔게 된다. 주인공은 독자들에게 말한다. “근데 너네도 내 상황 돼봐. 안 하고 배기나”, “장기 팔 생각도 했으면서 몸 파는 게 무섭냐?”고 말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좋은 곳’에서 돈을 많이 벌어, 이 돈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그녀에게는 짊어진 짐이 너무나 많았고, 빚을 털어내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사건이 발생한다. 이 지점이 ‘신데렐라’ 모티브가 차용되는 또 하나의 지점이기도 하다. 10살 많은 부유한 유부남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는 호스트바에서 일했던 사람으로 그녀에게 연민을 느꼈는지 주인공에게 이곳에서 탈출하자고 제안한다. 그 이후로 그는 그녀에게 등록금을 대주고 생활비를 챙겨주게 된다. 물론 이 돈은 그가 직접 번 돈이 아니다. 그 또한 아내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을 그려 놓는다. 이 과정을 민지환 만화가는 ‘꽃뱀’의 삶이라고 부른다. 


즉, 「체네렌돌라」에서는 아내에게 의지하는 꽃뱀과 남편에게 의지하는 꽃뱀이 동시에 등장하는 비굴하면서도 섬뜩한 이야기다. 삶이 대체 무엇이기에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 주체적으로 홀로 서지 못하고, 이렇게 기대서 삶을 지탱해야 할까. 하지만 만화가는 가난해서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런 지독한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물론, 이 말이 현실적이진 않다. 다소 괴이하다. 그녀는 호스트바 남자가 부인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살해하게 되고, 끝내는 사랑하지 않는 그마저 죽이게 되니 말이다. 게다가 살해된 그의 아이를 갖게 되었으니, 모든 유산을 의심 없이 상속받게 된다. 주인공은 더 이상 가난하지 않은 가족을 만들고, 삶을 이어나가게 된다. 가난이 드디어 종결된 것이다. 


이 작품은 더 이상 가난이 되물림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난’을 끊는 만화가만의 복수극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의할 것은 이야기는 단지 이야기뿐이라는 것을 독자들이 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혹자는 이런 무섭고 소름 끼치는 이야기가 작가의 본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상상의 영역이지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독자들은 역설적으로 우리 시대의 ‘가난’이 쉽지 않고, 그것을 돌파하는 방법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겠다. 그밖에 민지환 만화가만의 ‘형식’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담고 싶은 ‘내용’을 만화의 ‘형식’으로 표현하는 방식에 관심을 가지면 놀이의 차원에서도 만화를 즐길 수 있다. 해당 페이지는 217, 221, 223, 244, 297쪽이다.


『허무의 기록』 221쪾


며칠 전 만화가협회에서 주체하는 [2023 열린만화포럼] 연구발표회에서 만화의 ‘패턴’화에 대한 우려를 발표(「창작자의 의도와 비의도 사이에 발생하는 균열」)한 적이 있다. 패턴화가 반복의 형태로 차이를 생성해 낸다면 이런 패턴화는 의미 있지만, 단순한 패턴화는 지양해야 하지 않겠냐는 문제 제기였다. 물론, 내 글이 미흡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 제기에 토론을 맡은 일부의 토론자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일부의 토론자는 만화이기 때문에 패턴화가 가능하다고 합리화한다. 만화이기 때문에 패턴화가 가능한 것에 동의하지만, 이 패턴화가 모든 만화에 적용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의도적이고 창의적인 패턴화에 대해서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토론장에서 토론은 없었고 토론 후, 발표자에게 발언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발표자의 발언권을 박탈하는 게 말이 되는가. 단 1분이라도 줄 수 있지 않는가. 일방적인 훈계와 가르침만이 남는 연구발표회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행사는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너무나도 유치한 정치적인 행위로 보인다. 


내가 이런 말을 적는 이유는 만화의 ‘의도’가 작화와 상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만화뿐만 아니라 나를 표현하는 대부분의 장르는 ‘실존’과 ‘삶’이라는 무게가 함께 간다. 이런 무게를 고려하지 않고, 만화의 패턴‘화’를 존중하는 행위는 옹호하기 힘들다. 이런 맥락에서 민지환 만화가의 「체네렌돌라」는 적당한 상상과 적당한 현실이 잘 버무려진 맛있는 찐빵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 후기(後記)에 적힌 “앞으로도 다양한 만화로 찾아뵙고자 합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야기들을 선보이고 싶습니다”라는 말처럼 무엇인가 작가로서 패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마츠모토 타이요의  『동경일일』(2023)에 등장하는 오래된 예술가들처럼 영혼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건강한 고민을 하고 싶은 장(場)조차 주어지지 않은 만화계는 늘 매번 독자에게 끌려다닐 듯하다. 독자가 최고이고, 독자만이 만화의 잣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나아가 이런 독자를 연구하는 집단만이 공신력 있는 단체가 된다. 이는 결국, 돈이 되는 만화가 기준이 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돈을 몰고 오는 시장만이 의미 있다는 것을 넌지시 표현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만화계가 개성을 가진 만화가들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관심은 어쩔 수 없는 시선처럼 보인다. 미술가 마크 로스코는 “예술가로서 우리의 기능은 관객이 그의 방식이 아니라 우리의 방식으로 보도록 만드는 데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만화가 또는 만화인들이 이 말을 옹호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런 목소리를 옹호하는 목소리도 함께 논의되어야 하지 않을까. 현재 만화계는 역으로 달리고 있는 듯하다. 헤게머니를 위해 발악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독한 비평가는 『동경일일』에 등장하는 사오자와 씨처럼 고독하게 예술가를 찾아 떠나야겠다. 어처구니없는 수모 앞에 모든 힘을 잃었다. 


필진이미지

문종필

글쓴이 문종필은 평론가이며 지은 책으로 문학평론집 〈싸움〉(2022)이 있습니다. 이 평론집으로 2023년 5회 [죽비 문화 多 평론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밖에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주최하는 대한민국만화평론 공모전 수상집에 「그래픽 노블의 역습」(2021)과 「좋은 곳」(2022)과 「무제」(2023)을 발표하면서 만화평론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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