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이 처음 등장한 게 2006년쯤이라면, 2024년의 독자들은 한창 직장생활을 할 나이가 되었으리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한편으로는 웹툰에 익숙한 세대가 직장생활을 하고 부모가 되는 과정에서 나올 수 있는 몇몇 장르가 있는데 ‘오피스물’은 개중 하나다. 일찍이 인터넷 소설에서 출몰했던 이 오피스물은 이제 단순한 향유의 대상을 넘어 ‘일상화된 웹툰’에 침투한다. 사실 이 분야에서는 <미생>이라는 유명작이 있어 별도로 설명할 게 없지만 그럼에도 던져볼 만한 질문은 있다: 우리는 왜 타인의 직장 생활을 보고 있을까? 이세계 헌터물이나 로맨스 판타지 같은 장르는 현실에서 성사되기 어려운 일들에 관한 대체 욕망을 보여주지만, 오피스물은 그렇지 않다. 당장 직장 생활도 스트레스받는데 만화에서조차 직장 생활을 들여다본다는 건, 얼핏 들었을 때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상물의 특징은 욕망에 대한 실현과 분출이 아니라 개개인의 삶에 관한 공감과 연대에 주로 방점이 찍힌다.
오피스물도 장르가 여러 갈래라 콕 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일상물’로서의 오피스물은 자신을 구성하는 동료들에 관한 서술을 가져간다는 특징이 있다. 같은 사람과 오랜 기간을 일하기 어려워진 현대 사회에서 ‘동료’란 어쩌면 약한 연결고리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상물로서 오피스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자아의 실현이나 처세술에 관한 내용이기 전에 직장 내에서 ‘중심’은 언제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단언이다. 직장 내에서 ‘나’의 존재는 단지 자신만이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주변 동료와의 협업이나 위치잡기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 이 미묘함은 직장인에게 부유의 감각을 선사하며, 무언가 삶에 발을 제대로 붙이고 있지 못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꼰대 관찰자>는 바로 이런 구석에서 들어맞는 작품이다. 주인공 ‘임대곤’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이 작품에서 독자는 말 그대로 관찰자의 위치에 선다. 작품은 크게 임대곤의 직장과 가족을 그리면서 ‘꼰대’에 관해 질문한다.
부분적으로 매체에서의 독자와 공명하는 구석이 있는 이 설정은 인물이 살아가는 터전들에 대해 독자가 가장 이입하기 쉬운 자리를 제공한다. 우선 만화 매체가 컷과 컷을 구분 짓는다는 점에서 인물의 살을 부분적이면서 단계적으로 묘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양식은 독자로 하여금 작품에 적절한 거리를 둘 수 있게 하면서도, 삶의 몇몇 순간들을 가져오며 이에 살을 붙이는 형태로 주도권을 쥐여준다. 요컨대 독자에게 일상물이 흥미롭게 다가오는 부분은 만화가 보여주는 것들을 자신의 삶에 침투시켜, 체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우 만화는 이미지의 한 컷으로서 스펙터클로 다가오지만, 일상물의 이야기는 독자의 삶을 초과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물은 설사 그게 자신과 닮아 보기 힘든 이야기라 하더라도 컷을 나누는 것만으로 이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실눈을 뜬 채 손가락 사이로 세상을 들여다보는 관찰자의 감각을 선사한다.
<꼰대 관찰자>는 그런 점에서 짚어볼 구석이 있다. 꼰대라는 단어가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을 무렵 사람들 사이에서 대두했던 건 “나도 혹시 꼰대?”라는 자기에의 질문이었다. 자신에게서 꼰대를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적어도 일상물의 형식을 빌리면 그런 부끄러움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독자의 삶을 초과해있지 않은 이들 일상에서 독자들은 자신을 투입할 틈새를 발견하며, 이는 곧 만화를 보며 경각심을 얻는 부류가 아니라 반대로 만화에 의해 자신의 삶을 복기할 만한 찌름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가령 이 만화에서 회사 생활은 가족에서 의외의 해법이나 힌트를 얻기도 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만화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이 둘을 완전한 공백으로 만들거나 대체하지 않으면서, 독자로 하여금 양측에서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있게 해주는 일이다. 마치 직장생활처럼 동료들에 의해 위치 지어지는 이런 모습이, <꼰대 관찰자>를 보는 즐거움이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