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플 군바리에 대한 변명
0. 「뷰티풀 군바리」가 통과한 시간.
「뷰티풀 군바리」는 2015년부터 2024년까지 연재된‘여자도 군대 가는 만화’다.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와 정확히 겹치는 연재 시점과, ‘여자’와‘군대’를 병치시킨 결과로(당연하게) 형성된‘어그로’에 의해 수많은 논란을 동반한 「뷰티풀 군바리」(“초등학생도 보는 「뷰티풀 군바리」의 여성 혐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49607)는 ‘연재 중단 청원’까지 겪어야 했다. 연재 중단 청원이 이루어진 시점은 문학계를 선두로 각종‘빻은 작품’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다소 비장한 여성주의적 결의로부터 비롯된 각종‘논란’들과 비판들은 그 자체로 유효하면서 동시에 그 시대를 통과한 우리에게 페미니즘에 대한 다른 감각을 남겼다. 올바른 여성 주체를 건설하기 위해 동원된 각종‘자격’에서 탈락한 작품과 등장인물들이 (온전히 탈락하지 않고) 끊임없이 우리에게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탈락자’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온건한 자격을 가져 사람들에게 기억될 만한 사람들만 사라지다. 기억되지 않는 사람들은 살아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이러한 관점에서‘끈질긴’ 여성 혐오 논란에도 불구하고, 9년 간 유령처럼 떠돌던 「뷰티풀 군바리」의 여성주의적 함의에 대해 다룬다.
1. 「뷰티풀 군바리」가 남긴 것들.
먼저 「뷰티풀 군바리」가 촉발시킨 각종 논란을 모두 집약되어 있는 2017년의‘연재 중단 청원’에 다루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뷰티풀 군바리」의 작가가 연재 목적으로 밝힌‘군 폭력 고발’과 달리, 「뷰티풀 군바리」는 성 상품화를 목적으로 하며, ‘여성 징집제가 채택된 사회’가 적어도 한국에서는‘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비판으로 이루어진다. 지극히 합리적이고 타당한 그러니까‘정치적으로 올바른’ 비판을 근거로 한 연재 중단 청원은 3만 명 이상이 동의하면서 공론장을 형성했다. 2017년은 2016년에 출판된‘82년생 김지영’이 문학계를 넘어 한국 사회 자체를 하나의 페미니즘 공론장으로 만든 시점이라는 점에서, 「뷰티풀 군바리」의 연재 중단 청원은 의심의 여지 없이‘여성 혐오’적인 것처럼 보이는 「뷰티풀 군바리」가 온몸으로 통과해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뷰티풀 군바리」가‘여성 혐오적 작품’이라는 지적에 모두 동의하면서도 연재 중단에는 끝끝내 동의할 수 없었다. 여성 혐오적 표현과 동반된 여성들의 서사가 지극히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성적 매력이 충만한’ 이미지와 ‘혹사당하는 여성 신체’ 이미지가 겹쳐지는 것에 대한 비판의 주요한 골자는 폭력으로부터 산출되는 성적 쾌감이었다. 이러한 이미지를 즐기는 독자들은 결국 정수아의 몸매에 환호하던 남성 군인과 구별되지 않고, 따라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답습하게 된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뷰티풀 군바리」가 남긴 것은(일명) ‘배빵’ 당하는 일병 정수아의 분절된 (성적) 이미지가 아니라, 폭력에 대항하는 병장 정수아이며, 폭력으로 유지되는 엄격한 군 체계의 부조리함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 불가능한 물음이다. 또한 「뷰티풀 군바리」의 여성 등장인물은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다양하며, 주요하게 다루어진‘모든’ 등장인물들이 여성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뷰티풀 군바리」에 쏟아지던 비판이던‘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여성 혐오적이라는 지적을 2024년에는 다르게 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표현의 외피와 무관하게 「뷰티풀 군바리」는 웹툰 중에서 가장 폭 넓게 여성 서사를 다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말이다. ‘여성도 (우리와 같이) 군대가는’ 복수극이라는 관점에서 웹툰을 즐기던 다소 치졸한 독자들이더라도, 끝끝내 「뷰티풀 군바리」의 정수아에게 감화되었을 것이라고. 정리하자면 우리는 「뷰티풀 군바리」를 여성 혐오적으로 즐기던 자들을 오염시킬 수 있으며, 그것은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뷰티풀 군바리」의 서사가 해낸 업적일 것이다.
2. 이건 치사한 전략이다.
이쯤에서 변명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나는 2015 ~ 2017년에 이루어진 지적을 2024년에 검토하는 치사한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렸다는, 시간이 흐르면서 얻은 깨달음을 회고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굳이 치졸한 방식을 택한 것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만 우리의 미래와 현재의 거리를 좁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 확신하고 있는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작품들의 미래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다른 것을 남길 것이다. 그리고 이는 치졸한 방식을 통해서만 어림할 수 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기억하는, 한 소설가의 말을 빌려 이를 (박솔뫼- [미래 산책 연습], 문학동네) ‘미래 기억’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이는 현재와 과거를 교차시킴으로써, 미래의 과거인 현재를, 현재의 과거인 과거로 기억해 내는 일은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판단도 유보한 채, 아직 오지 않을 미래를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는 걸까? 변명해야 할 두 번째는 여기에 있다. 2015~2017년에 이루어진 지적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확신하던 가치에 대해서 알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확신했던 가치로부터 촉발된 논의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확보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시간을 두고 검토할 수도 없다. 나는 지금 다소 진부한 결론으로 나아가고 있다. 가치를 믿고 행하되, 너무나 확신하지는 말자고. 너무 확신하지 않을 때, 오히려 더 공고해지는 믿음들이 존재한다는 결론 말이다.
진부한 결론에 부끄러워 변명을 하나 더 덧붙여 본다. 물론 이럴수록 더 구질구질해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류다희와 라시현의 각종 악행에 매력을 느꼈다. 끊임없이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는 주인공들이 매력적인 것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길티 플레져다. 악이 매력적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시몬 베유, 역: 윤진 - [중력과 은총], 문학과지성사 97p) “상상의 악은 낭만적이며 다양하지만, 실제의 악은 음산하며 단조롭고 삭막하며 지루하다. 상상의 선은 지루하지만, 실제의 선은 항상 새롭고 경탄할 만한 것이어서 사람을 도취시킨다.”는 시몬 베유의 훌륭한 지적에 동의한 대다수 사람의 반응은 실제의 선에 집중하고, 악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허구에서나 가능하다고 폄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저 문장이 나에게 남긴 것은 다른 질문이다. ‘상상의 악’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이며‘실제의 선’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은 양자가 도출하는 결론이 같은 것이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즉 상상적 악들과 실제적 선들이 완벽히 동일한 것을 지시해서는 아닐까? 이러한 의문은 나를 아주 오래 따라다니고 있다. 이 글을 읽은 독자들에게 나의 의문이 아주 잠시동안만 남아 있다면, 구질구질한 나의 변명이 누군가에게는 먹혔을 것이라고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