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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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그리고 기록해

연애의 기록(글, 그림 베어리/네이버웹툰 연재) 리뷰

2024-07-16 박민지

사랑해, 그리고 기록해

  일기쓰기는 평생 숙제같다. 기억력이 좋아진다.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계획적으로 생활할 수 있다 등등 일기의 장점은 많지만 꾸준히 실천하기란 어렵다. 일기쓰기 대신 SNS계정에 사진을 올려 일상을 기록하고 짧은 글귀도 적어봤지만 그마저도 점차 소홀해진다. 그런데 남의 일기를 보는 것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빠져든다. 타인의 내밀한 면을 엿보는 즐거움 탓일까. 작가의 일상을 담은 일상툰도 비슷한 이유로 좋아한다. 자전적 이야기를 담는 다는 것은 일상툰과 비슷하지만 베어리 작가의 기록 시리즈는 논픽션 만화에 버금가게 진실을 탐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연애를 기록한 서사물

  베어리 작가는 전작인 웹툰 <소년의 기록>, <병의 기록>을 통해 자신의 직접 겪은 경험담을 그려왔다현재 네이버웹툰에서 연재 중인 만화 <연애의 기록>은 기록 시리즈의 연장선 위에 있으며전작의 주인공이자 작가의 분신인 문석호의 모태솔로 시절부터 20대 중반 첫 연애와 이후의 연애담을 그린 서사물이다애니메이션처럼 고정된 프레임 속엔 이야기 배경인 2000년대부터 2010년대 서울의 실제지명과 당시 모습을 옮겨놓는다만화는 날짜와 날씨그날의 사건과 기분을 세세하게 기록된 일기처럼 문석호가 겪을 일을 순차적으로 따라간다.

  앞서 베어리 작가의 중학생 시절, 군대 시절을 만화로 접한 독자들은 작가가 그릴 연애의 기록에 기대감을 숨기지 않는다. 작가의 전작들이 솔직함을 너머 날것 그대로의 감성으로 정평나 과연 어디까지 표현할 것지가 관건이었다. 작가는 기대에 부흥하려는듯 몽롱한 눈빛과 빨간 립스틱이 번진 입술 등 도발적인 썸네일을 내세운다. 실제로 뚜껑을 열어보니 역시나였다. 만화에 등장한 인물이 실제로 작가에게 고소할까봐 걱정될 정도로 사적인 기록이다. 재구성은 했지만 허구는 없다는 작가의 말은 참말인지 싶다.

  때는 2008. 군대를 막 제대한 석호는 서울에 산다. 전공을 살려 첫 직장에 입사했지만 주말출근이 당연했으며 백 만원이 조금 넘는 열정페이를 받았다.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당연시하고, 연애하지 않거나 못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던 시절이다. 석호는 모태솔로 처지를 탈출하려 노력했고 성공한다. 서툴고 짧았던 첫 연애는 자신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것에 화를 내고 이별을 결심하게 만드는지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석호는 순결을 잃지 않은 첫 번째 이별을 겪고, 두 번째 연애에서 순수와 타락을 오간다. 상상과 다른 상대의 모습,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 관계는 감정의 밑바닥을 확인하고 사랑이 증오가 되는 과정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지극히 석호의 시점이라 사실여부까진 증명할 수 없지만 그 내밀한 내면 묘사는 왕의 이마에 난 혹까지 그리는 조선시대 초상화가처럼 가감없다.

  이따금 댓글창은 젠더감수성이나 도덕성에 관한 비판으로 과열되기도 했지만 작품에 빠져들면 석호를 마냥 비난할수만 없다. 독자들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렸더라도 의식 속에 숨기는 기억이 아니라 형태가 분명한 기록으로 남기려는 작가의 의지에 경의를 표하기 때문이다.

연애, 나를 사랑하는 과정

  석호는 연애가 끝나고 난 뒤 직장생활과 다른 경험을 시도하려 주말마다 홍대 예술인 프리마켓에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준다모태솔로를 벗어나려 전전긍긍하던 때와 다르다업그레이드된 외모와 매너로 이성의 관심을 받고 그것이 익숙해진다호감가는 사람과 만나봤지만 또 다시 상대방과의 차아를 확인하고 헤어진다석호는 이게 인기남이다그러나 N번째 반복되는 연애의 흥망성쇠에 염증을 느낀다나도 상대도 서로 원하는 만큼 변하지 않는다애초에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건 불가능하다서로의 차이를 발견하고 인정하고서야 끝나는 연애그의 깨달음은 연애의 기록을 청춘의 기록으로 확장시킨다.

  ‘연애하지 않는 나의 삶은 휘몰아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난 고요함과 같다. 석호는 본격적인 어른의 기준점 같은 서른을 코앞에 둔다. 자신의 진로를 재정비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석호는 고민 끝에 회사와의 계약이 끝나면 직장을 옮기지 않고 예술가가 되기로 한다. 래퍼와 만화가라는 두 갈래길 중 하나를 택하려 고립을 자처한다. 혼자 있는 것이 싫어 연애에 몰두했지만 이제는 혼자만의 시간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누군가 연애를 하는 건 연애하는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연애란 나 자신을 망가뜨릴 정도로 가치있는 건 아니다. 석호의 여정은 만화를 그리는 현재에 가까워진다.

  연애를 하는 이유, 하지 않는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사건들이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과정이 아닐까. 소모적인 연애일지라도, 상처만 남았을지라도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속 브리짓이 그랬던 것처럼 연애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나는 를 기록한다.

  한국콘텐츠진흥원 <만화산업백서중 '2023 만화·웹툰 이용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웹툰 독자들의 주 이용 서비스 순위에서 인스타그램이 5(13.6%)를 차지했다이느 군소 웹툰플랫폼보다 이용 순위가 높다무료이용이나 스낵컬쳐로써 인스타툰을 찾는 독자들도 많지만그만큼 공급이 늘고 자신의 인생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기록이 있기에 기억이 업데이트되고나를 형성하는 나만의 기록이 있다는 것이 새삼 부러웠다세파에 시달려 내가 누구였는지조차 잃어버릴 수 있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스스로를 되짚는 작업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깊다나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갈 힘이 될 것이다.

  웹툰 <연애의 기록>은 기억에서 출발지만 진정성과 현실고증덕분에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제 이야기는 전환점을 돌았다. 석호는 연애하기를 멈추고 웹툰작가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2024년부터 진행될 2부에서 석호의 꿈과 변화된 연애담은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를 묘사하는 석호를 따라가보니 다시끔 일기가 쓰고 싶어진다.

필진이미지

박민지

만화평론가
2021 만화평론공모전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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