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걷히는 순간을 향해서, <펜홀더>와 이은재 월드
△ 펜홀더 포스터 (출처 : 네이버시리즈)
소년, 먼치킨 그리고 학원물
소년만큼 대중서사에서 사랑 받아온 캐릭터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캐릭터로서 소년이 갖는 특징이 있다면, 대중이 소년에게 거는 기대가 비교적 뚜렷하다는 것이다. 대중은 소년에게서 성장하는 모습을 기대한다. 나이를 먹고, 세상을 경험하며, 새로운 관계를 맺은 뒤에, 궁극적으로는 성인이라는 다른 상태로 이행하는 모습을 보기 원한다. 소년이 고난과 역경 끝에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성인으로 거듭나는 모습은 대중에게 약속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이러한 때문에 소년은 수많은 요구들이 교차하며 변동적인 니즈를 요구받는 대중서사에서도 소년은 작가들에게 사랑받는 캐릭터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소년이 약속된 변화를 보장하기 때문에 인기있는 인물이라면, 반대 쪽에는 변화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장하기 때문에 인기있는 캐릭터도 있다. 바로 먼치킨이다. 비정상적으로 강한 캐릭터는 마치 핵앤슬래시의 캐릭터를 플레이하는 듯한 학살자로서의 재미를 준다. 독자는 안정적으로 주인공에게 친밀감을 붙일 수 있다. 때문에 많은 작품들이 오래 전부터 소년과 먼치킨을 결합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의 대표적인 성과가 학원액션물이었다. 1996년부터 2014년까지 20년 가까이 연재된 임재원의 <짱>이 소년과 먼치킨을 혼합시킨 대표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 짱 포스터 (출처 : 네이버시리즈)
다만 학원액션물은 분명한 장점만큼이나 단점 또한 뚜렷했다. 앞서 언급한 <짱>의 사례를 생각해본다면, 독자가 주인공과 그의 행동에 강하게 몰입할 수 있는만큼 액션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짱>의 전반부는 한국만화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을만한 걸출한 액션 장면들을 연출하며 장르물이 가져야 하는 덕목들을 후대에 유산으로 남겼다. 다만 만화 자체의 소구점이 액션에 치중되어 액션과 액션 사이에 들어가야 할 서사들이 빠른 이야기전개에 희생되었으며, 학생들의 일상과 성장은 깊이있게 다뤄지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그리고 두 장단점이 한 작품 내에서 결합하며, <짱>은 후반부로 갈수록 높은 품질의 창작보다는 양산에 가까워지는 형태를 보였다.
이러한 학원액션물의 장단점은 웹툰 시대로 넘어오며 더욱 두드러졌다. 학원액션물의 캐릭터들은 일종의 코드처럼 클리셰화 되어, 학원일진물이라는 하위 장르로 계승되었다. 학원일진물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비교적 최근 네이버 웹툰의 절대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박태준만화회사의 <외모지상주의>와 같은 작품들을 생각할 수 있다. 분명한 소구점과 이에 호응하는 대중들, 그리고 그를 기반으로 타 작품들에 비해 압도적인 생산력을 자랑하는 반면 <외모지상주의>, <김부장>에서는 <짱>의 초기에 가지고 있던 탁월한 품질의 액션장면을 찾아보기 어렵다. 더불어 <촉법소년>에서는 서사의 동력을 잔학성과 같은 선정성에서 얻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텐 스틸컷 (출처 : 카카오 웹툰)
학원물의 탐구, 이은재 월드
이은재 역시 오랫동안 학원물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차용해 소년을 그려왔다. 출세작 <TEN> 이후 그의 만화 속 주인공은 교복을 벗은 적이 없으며, 등교를 하고, 선생을 만났고, 친구와 적을 만나 성장하여 이야기의 출발점으로부터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 왔다. 다만 이은재의 작품들을 학원액션물로 분류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심지어 일진과 그에 대항하는 서사를 가진 그의 출세작 <TEN> 또한 분류상으로는 학원액션물로 분류할 수는 있겠으나, 학원액션물로 분류하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TEN>의 소구점이 액션보다는 성장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TEN>의 주인공 김현은 왕따를 당하며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불의의 사고로 인해 문제아만 모아놓은 무명고로 전학을 가게 된다. 김현은 그곳에서 무명고에서 가장 강하다고 여겨지는 이걸재를 만나고, 자신이 왕따였음을 인정하고 스스로의 처지를 자각하는 자리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만화 밖에 있는 독자들에게 제 4의 벽을 넘어 “나는 왕따. 구경 재밌게들 잘하셨습니까?”라고 외치는 순간까지 성장한다. 이러한 김현의 성장은 먼치킨을 전면에 내세운 학원액션물과는 다르게 주인공이 올바른을 외치는 수준까지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 했다는 다른 종류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 펜홀더 스틸컷 (출처 : 이은재 X{구 트위터} 계정)
그렇다면 이은재가 먼치킨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학원액션물과는 다른 소구점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일까? 이은재의 최신작 <펜홀더>는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는 작품이다. <펜홀더>의 주인공 한이연은 자신이 타고난 신체조건을 이용해 승부의 숭고함을 가볍게 해치던 인물에서 점차 승부의 정직함을 믿게되는 인물로 성장한다. 스스로 흘린 땀의 가치를 믿으며, 정직한 경쟁을 통해 승부에 임하는 모습을 한이연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그의 출세작 <TEN>이 제공했던 학원물로서의 카타르시스 “주인공이 올바른을 외치는 수준까지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 했다”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이은재 월드가 그리는 카타르시스의 기저에는 독자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모습, “올바름에 대한 갈망”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은재 월드의 학원물 속에는 세상의 부조리와 냉소주의가 지배하는 피카레스크의 비판이 아닌, 그 부조리함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직한 고민과 과정이 그려진다. 이은재는 <펜홀더>를 그리기 전 네이버웹툰에서 <셧업앤댄스>를 연재한 바 있다. <셧업앤댄스>가 공개되었을 당시 이은재의 독자들은 그의 만화가 밝아졌다는 데에 놀라움을 표한 바 있다. 초기작 <청춘극장>을 덮고 있던 청춘이 겪을만한 부조리와 무거운 공기 또한 사라졌음에 당혹감을 표한 독자 또한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는 이은재 월드가 지향하는 바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은재 월드는 어둠을 탐닉하는 대신 어둠이 걷히는 여명의 아름다움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