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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도 부천만화대상 대상 수상작 '정년이' 리뷰 : 결국에 모든 것을 이기는 건 사랑

2024년도 부천만화대상 대상 수상작 '정년이' 리뷰

2024-07-23 주다빈

결국에 모든 것을 이기는 건 사랑

 2020년 이사 갈 집의 전 세입자의 이사를 기다리며 충청도의 어느 군에 있는 복도식 아파트에서 자음과 모음을 연결했다 해체하며 쉼 없이 문장을 조직하던 때가 있었다. 끝에 가서는 하도 같은 문장을 읽고 고치고 수정하고 첨가해 댄 덕에 글 전체가 제대로 쓰인 게 맞는지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더는 주변 지인들에게 이 길고 재미없는 글을 읽어달라 하기도 염치없어질 때쯤 <2020 만화·웹툰 평론 공모전>에 끝끝내 원고를 보냈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내가 가진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마음의 정도가 고작 이것이라는 게 부끄럽지만) 공모전에서 신인 부문 대상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덕분에 웹툰을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넘어 웹툰 산업 어귀를 거닐 수 있게 됐다.

  그때 내게 상을 안겨주었던 작품 중 하나가 <정년이>었다. 이번 원고 의뢰를 받게 되었을 때, <정년이>를 써야 한다는 어떤 사명감과 <정년이>만큼은 절대 쓰면 안 된다는 공포심, 두 개의 감정이 갈비뼈 너머로 넘칠 것처럼 찰랑거렸다. 후자 쪽이 조금 더 진심에 가까웠던 것 같다. 마치 방 정리를 시작하고 40분 정도 지났을 무렵 방바닥과 침대, 책상 어디 하나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마음처럼 할 이야기는 많이 남았지만, 다시 손 데어 이야기를 꺼낼 자신이 없었다. 다시 시작할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더럭 겁을 먹고 도망가기 일쑤라 담당자께 지금이라도 다른 원고를 쓰면 안 되냐고 여쭤볼지 며칠을 고민했다. 더는 무를 수도 없게 됐을 때도 0과 1로 만들어진 A4 용지를 켜놓고 노동요를 고른다는 핑계로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가 '오늘은 글렀네. 영 그분이 오시질 않아.'하고 마치 엄청난 명필가인 척 자기 암시를 걸며 책상을 떠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게 됐고 다시 <정년이>를 읽는 것부터 시작했다.

  서이레, 나몬 작가의 <정년이>의 수상 이력에 '부천만화대상' 대상이 추가된다. 좋은 작품은 독자가 어떤 배경을 가졌든지 간에 좋은 작품이라 여겨질 테니,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미 앞서 다양한 상을 받았고, 창극 공연은 성공적이었으며 올해는 찰떡 캐스팅으로 많은 팬들의 기대를 모은 드라마 방영을 앞두고 있다. 심지어 서이레 작가가 '정년'을 만들 때 생각했다던 김태리 배우가 '정년'을 연기한다. 그럼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이 좋다는 것을 명명백백히 알게 된 지금 이 시점에서 나는 이 작품의 또 어떤 점을 칭찬하면 좋을까? 이전에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면서 '정말 운이 좋았구나. 장인이 된 마음으로 이 글을 갈고 닦아야 하는 건 아닐까'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이 이야기를 또 꺼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며칠을 고민해 내린 결론은 '역시 사랑을 이야기해야만 하겠다'는 것이다. 저울로 사랑을 측량하려는 이 시대에 <정년이>가 가지는 의미는 우리가 잊고 있던, 우리가 염원하던 사랑이 있다는 것일 테니까. 1956년 혼란과 혼동의 시기 <정년이> 속 인물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지금보다 더욱 일그러져있었다. 여성 국악인 비율이 더 높았지만, 쉬이 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환경에 반응하고자 여성 국악인들은 연대하여 국극이란 장르를 만들었다. 그러나 결혼으로 인한 국악인들의 탈퇴, 국극의 인기에 빌붙어 피를 빨아먹던 사기꾼들로 인해 건강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이내 사그라들었다. 작중에서도 '정년'이 몸담았던 '매란''혜랑'의 과욕에 불투명하게 운영된다. 이때 '혜랑'과 결탁했던 사업부 남성들은 '혜랑'의 욕망을 이용해 매란 국극단의 공금을 편취 및 횡령한다. 이는 결정적으로 '매란'을 폐단의 위기로 내몬다. 한편, 국극의 주 관객층이었던 일반 여성의 사회적 지휘 또한 남성에 의탁하지 않고는 '진짜 여성'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부용''민형'과의 정략결혼에 부당함을 느끼지만 '민형'의 유무로 자신의 일상을 위협당하는 경험을 통해 '남성'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이렇듯 자꾸만 미끄러지는 세계에서 인물들은 '사랑' 함으로써 서로의 팔과 팔을 잡고 세계의 흐름을 거스르고자 한다.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주 이번 원고의 소제목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의 놀라움, 기쁨 등이 담긴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에서 따왔다.)

  알랭 바디우는 자신의 책 『사랑 예찬』에서 진리에 벗어난 사랑을 유아론적 자기동일성의 세계에 그치는 것으로 이야기했다. 우리가 겪게 되고 하고 있는 사랑은 여전히 상대에 자신을 투영시키는 비진리의 사랑이다. <정년이>에서 '혜랑'은 '옥경'을 자신의 옆에 붙잡아 두기 위해 자신과 '옥경'을 동일시하며 자신의 욕망을 '옥경'에게 투영하며 자기와 분리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행동의 부작용으로 '옥경'은 퇴단하고 '혜랑'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자신의 곁을 떠난다며 괴로워한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러한 사랑을 하고 있으리라.

  이러한 동일시 오류는 대체로 <정년이>에 등장하는 남성 인물들에게서 보인다. 이들은 여성 인물을 자신들의 소유로 인식하며 여성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부용'의 아버지는 자신의 명성을 위해 아내의 글을 죄의식 없이 훔치고 또 어린 딸을 이용해 일찍이 명망 있는 집안에 줄을 댄다. 그러면서도 일절 여성의 삶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집안의 규칙과 규율을 통제하는 왕으로 군림한다. 한편, 정략결혼 상대인 '민형'은 독자적으로 움직여 '부용'의 인간관계에 참견하고 결국 '부용'이 여성으로서 여러 위험에 노출되는 일상의 파괴를 경험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부용'은 자신의 안온했던 삶의 붕괴를 겪으며 진심의 무가치성을 깨닫는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동명의 책에서 서로 다른 두 명이 만남으로써 생기는 '사랑'을 '예외적 사건'이라 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만화경으로 바라보던 세계를 와해시킬 수 있으며 이는 더욱 성숙한 인간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된다. <정년이>에는 여성 간의 연결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헤집고 폭파하고 또 새롭게 구축시키는 여성 인물이 잔뜩 나온다. 그들은 상대 여성에 의해 성장하고 나아간다. '주란'은 '옥경'을 '자기 수의를 벗겨준 사람'으로 칭한다. 오직 자신의 연기와 창에만 관심 있고 다른 연습생을 무시하던 '영서'는 떠나는 '주란'에게 '너와 한 번 더 연기하고 싶었다.'라며 진심을 전하기도 한다. 이후 이 둘은 '주란은 무조건 영서와 다니는 관계'로 발전한다. 또 '숙영'은 '도앵'의 왕자 역을 보겠다는 팬심, 어쩌면 사랑으로 '매란'을 나가 소규모 국극단에서 고생하는 '도앵'을 가장 가까이에서 돕는다.

  이런 관계성은 '정년'과 '부용'에게서 여실히 드러난다. 훤칠하고 똑똑한 정략결혼 상대가 정해진 부잣집 독녀와 목포 시장에서 조개 팔던 맏딸로 완벽히 반대 선에서 성장했다. 그런 두 인물이 국극이라는 배경 속에서 만나는 것은 그들 삶의 예외적 사건이다. 그들은 남성 캐릭터들이 그러는 것처럼 타인을 종속시켜 자신을 투영하지 않는다. 그저 서로가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기다리며 온전히 상대가 자신을 보여줄 때까지 기다린다. '정년'이 과한 연습 끝에 목소리를 잃고 고향으로 도망쳤을 때, '부용'은 갑작스러운 '정년'의 도망에 화가 나기도 하지만 '얼마나…. 얼마나 힘들까.' 하며 '정년'의 상황을 이해하고 마음 아파한다. '정년'은 국극단으로 돌아온 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결혼식을 올리려던 '부용'을 만나 자신이 무대 위에서 '부용'을 기다릴 것이라고 진심을 전한다. 또 7년이란 긴 시간 동안 '부용'을 기다리며 자기 말을 지킨다. 바디우가 말한 사랑의 철학은 이런 것 아닐까. 서로에게 폭력적이지 않은 그저 상대를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결국 <정년이>에서는 진심은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 사랑은 결국 행복한 결말을 가져온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보여주었다. 물론 아직 진리의 사랑을 찾지 못한 캐릭터에게도 또 다른 기회의 시작을 알리면서. 지금까지 많은 글들이 <정년이>를 여성 서사의 맥락에서 읽어왔다. 내 첫 원고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웹툰을 읽어냈는데 '왕자가 사라진 시대에 왕자가 되어 사랑을 얻는다.'는 마지막화에 따라 사랑의 윤리로 웹툰을 읽어냈다. 마음의 무게를 숫자로 재어야만 똑똑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요즘 세상에 진정한 사랑의 윤리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정년이>는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작품이다. 이번 원고에서는 다른 인물들보다도 '정년'과 '부용'에 집중하여 읽어냈다. 나머지 인물들의 관계를 읽어내는 재미를 여러분에게 드리며 글을 보내본다. 사랑으로 힘겹게 쓴 원고이니 <정년이>를 사랑하는 분들에게 부디 기쁜 편지이길 바라며….

필진이미지

주다빈

만화평론가
2020 만화·웹툰 평론 공모전 신인부문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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