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임신을 넘어서
0. 여성의 몸?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가 내놓은 획기적인 전회('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이후의 페미니스트들은 보부아르의 시각이 '남성적 초월의 왕국에 들어간 여성을 해방된 여성으로 보는 시각'을 가진 채로, '이분법과 여성 육체에 대한 적대감(소냐 크룩스)'을 표출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들이 보기에 보부아르가 겨냥하는 페미니즘의 가장 큰 적은, '여성의 신체'였기 때문이다. 즉 가부장제가 휘두르는 가장 큰 무기가 여성의 신체라는 입장을 보부아르가 견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보부아르는 월경을 저주라고 부르는 한 부족을 인용한 뒤, 다음과 같은 문장을 덧붙인다.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바로 그 육체이다. 그러나 여자의 육체는 그녀 자신과는 별개의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 : <제2의 성> 을유문화사)
△ 「안할 이유 없는 임신」 중.
<안할 이유 없는 임신>이 채택하고 있는 미러링적 상상은 보부아르적 인식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 만화가 거둔 성공의 기저에는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여성 차별의 근간이 임신, 출산에 있다는 진실로부터 비롯한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남성이 임신할 수 있다면, 외부인(여성)으로부터 전통을 빌려올 수 밖에 없는 가부장제의 모순적 구조가 '적통이 적통을 낳는 것'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형태로 드러날까?
1. 성별 반전의 극본
성별 반전을 위해 빌려오는 SF적 상상력의 단초를 제공한 것이 보부아르라면, 그것을 최초로 극본화한 사람은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일 것이다. 파이어스톤은 <성의 변증법>에서 여성이 임신, 출산, 육아를 지속하는 한 열등한 존재로 남아있는 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주장하며, 남성 임신, 국가 육아를 제시한다. 파이어스톤의 극본에서 '여성'은 재생산하지 않는다. 보부아르와 파이어스톤의 지적대로 임신과 출산은 여성 억압의 가장 큰 무기였다. 보부아르의 주장과 파이어스톤의 극본을 통해 이후의 세대가 답변해야 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알약 하나로 임신을 막을 수 있는 시대에서 왜 여전히 여성이 알약을 먹지 않고 무려 사회를 위해 재생산해야 하는가? 왜 여전히 여성이 임신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안할 이유 없는 임신>은 ‘여성만이 재생산할 필요가 없다.’고 답변하는 듯 싶다.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직접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을 상상하여, 종국에는 부부 임신을 통해 상호의 고통을 완연하게 이해하는 아름다운 세계를 답변으로 내놓는 이 만화는 (그것의 현실성과는 무관하게) 지나칠 정도로 안전한 상상에 기대고 있는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여성 억압의 근본 원인이 임신, 출산과 같이 자연(적인 것이라 여겨지는)에 기대고 있다면, 그것을 남성에게도 ‘자연’을 부여하면 남성과 여성은 완연히 평등해지는 것일까? 즉 여성의 몸이 생물학적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기술적 개입으로 그 운명을 남성에게도 이식한다면 여성의 몸은 여성이 완벽하게 정복할 수 있는 것일까?
2. 가부장의 외부인
△ 「안할 이유 없는 임신」 중.
가부장제의 구조가 모순적인 이유는 그것이 유지되기 위해 완연한 타자를 개입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즉 ‘외부인’인 여성을 개입시키지 않고는 가부장제가 유지될 수 없다. 따라서 ‘최씨가 최씨를 낳으면 마 적통 중의 적통 아이가’라는 최남진 할아버지의 말은 가부장제에서 외부인을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허구적 욕망에 대한 반응이다. 오해하지 말길. 나는 여성이 임신을 거부하면 가부장제 사회에서 퇴출될 것이라는 유교적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애초에 가부장제 사회에서 퇴출되길 소망하지 않는 여성이 세상에 어디있단 말인가? (있긴 할 것이다...그리고 그 사실은 언제나 골칫거리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여성은 임신을 거부하든, 거부하지 않든 사회를 유지시키는 타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상상해야 할 것은 남성이 임신하는 세계가 아니라, 모두가 임신하지 않아, 지속되는 것이 불가능해진 세계가 아닐까? 남성이 임신을 하면 적통 중에 적통이라는 가부장제에 미쳐버린 사람을 통해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을 넘어, 그 적통을 낳음으로서 최씨 가문, 나아가 사회의 미래를 안정적으로 도모하는 것 자체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나에게 페미니즘적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는 이를 탐사하기 위함이며, b와 같은 대답을 하는 사람들을 변명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왜 끊임없이 아이가 태어나고 사회가 유지되는 낙관적 미래를 상상해야 하는가? 왜 세계와의 협상에서 우리가 세계를 포기해버릴 수 있다고 협박을 해서는 안되는 것일까?
<안할 이유 없는 임신>이 채택한 남성 임신 전략은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모순적인 욕망을 직시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페미니즘 내부의 건설적인 미래를 위해 채택한 안전한 방법이라는 인상을 지우기는 쉽지 않다. 이 만화의 서사는 여성과 남성이 시민적 권리를 동등하게 점유해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해서 페미니즘적 주장인지도 헷갈릴 정도의 입장에서 공유되는 '여성의 육체로부터 여성을 해방하기'라는 긍정적 가치를 강화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리 에델만이 지적했듯이 '진리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좋은 것이 아니라 (퀴어성과 동일하게도) 좋다고 여겨지는 모든 개념을 공허하게 만드는 완고한 특수성에서만 발견’되며, 따라서 '긍정적으로 여겨지는 사회적 가치를 강화하는 것을 야기한다면 그것은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Lee edelman <No Future : Queer Theory and the Death Drive.> - Duke university press 다음의 원문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Truth, like queerness, irreducibly linked to the ‘‘aberrant or atypical,’ to what chafes against ‘‘normalization,’’ finds its value not in a good susceptible to generalization, but only in the stubborn particularity that voids every notion of a general good." "The embrace of queer negativity, then, can have no justification if justification requires it to reinforce some positive social value; its value, instead, resides in its challenge to value as defined by the social, and thus in its radical challenge to the very value of the social itself.") 모두에게 부정적이고,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결말만이 예상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는 새로운 페미니즘적 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 실패란 퀴어의 그리고 여성의 가장 큰 자산이기 때문이고,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3. 세계와의 협상 속에서
△ 「안할 이유 없는 임신」 중.
<안할 이유 없는 임신>이 채택한 주인공 부부가 모두 임신하는 결말은, 국가의 입장에서 축복할 일인듯 싶다. 출산율 0.4의 국가에 과학 기술로 무장한 김삼신이 남성에게 아이를 점지하는 것은, 정부가 출산율 강화를 위해 '가임기 지도'를 만드는 것보다는 합리적인 일이라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김삼신은 정부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만화가 김삼신을 등장시키면서 얻은 것은 미래 세대를 생산하는 데 있어서 남성과 여성이 공동으로 부담한다는 타협이다. 마치 웨딩 업체에서 업계 확장을 위해 동성 부부들을 타겟으로 하는 광고를 시작하는 것을 환영하는 성소수자 단체들과 같이, 자본 또는 국가의 논리를 위해 엉겹결에 PC해져버린 정부와 기업을 거절할 수 없어 적당히 타협하게 되는 결론은 현실 세계에서도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타협 대신에 "세상 전체를 배면, 그것을 낙태할 수도 있는"(우지안 희곡 <다정이 병인 양하여> 중 주인공 ‘다정’의 대사) 잔혹하지만 매력적인 협박을 내놓는다면 국가는 어떻게 될까? 가령 성 소수자들이 결혼할 수 있는 안전하고 건강한 세계를 꿈꾸는 대신, 가족 제도 자체가 끔찍할 정도로 이기적인 구조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세상을 너무나 피곤하게 사는 방법이기만 할까? 정부 또는 기업이 제시하는 미래에 대한 가능한 낙관과 은밀한 희망을 모두 포기하고 세계 자체를 절멸시키는 세계에 대한 포기를 상상해보자는 제안은 너무나 급진적인 것일까?
물론 이러한 의문들은 <안할 이유 없는 임신>에 대해 지나칠정도로 과도한 요구를 제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상천외한 '페미 논란'을 생각해본다면 <안할 이유 없는 임신>이 급진적이지 않다고 평가할 수는 없을 듯 싶다. 다만 현재 한국에서 주요하게 논의되는 페미니즘적 의제가, 여성이 사회에 안정적으로 안착하기 위한 방해물을 제거하는 것으로 집중되어온 것을 상기해보자. 물론 이는 한국에서 여성을 대해온 역사를 통해서 충분히 이해 가능한 현상이지만, 이러한 의제가 거부하지 못하는 최종적 심급은 국가와 시장 논리라는 점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여성 또한 남성과 동일하게 시민적, 경제적,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선언에만 매몰되는 것은 그러한 주체가 양산하는 '유연한' 자본-국가적 논리에 대한 온당한 물음을 삼켜버린다. 임신과 출산을 남성과 여성에게 공통으로 배당한 말끔하게 아름다운 세계는 그것의 현실성과 무관하게 세계를 매끈하게 밀어버린다. 나는 세계라는 표면을 매끈하지 못하게 만드는, 반드시 요철처럼 튀어나와 자신을 내세우지만 끊임없이 깎여지는 존재들의 세계를 상상하고 싶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를 상상하고자 하는 것은 나 뿐만은 아닐 것이라고 감히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