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童心의 율려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글, 그림 찰리 매커시 / 상상의 힘 출판) 리뷰

2024-08-13 박동성

童心의 율려

  불편한 진실인가 편안한 거짓인가? 진실을 밝히면 불편해지고 거짓을 말하면 편해진다고 말하는 쪽이 더 정확할까? 사람들 간의 소통에서 후자가 득세하는 상황이 적지 않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진실은 멀고 거짓이 안개처럼 퍼지는 형국이니, 양자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가능성으로부터 탈출해 또 다른 가능성을 타진할 수는 없을까? 제3의 그런 선택지를 구성해 볼 만한 실마리를 童心에서 구해보는 것은 어떨까? 한 치의 티도 없이 맑은 진실을 발화하기도 하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라는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바가 있다.

  찰리 맥커시의 진심 어린 위안은 순수한 소통을 갈구하는 지금 우리에게 묵직한 감동이 될 것이다. 찰리 맥커시의 만화책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이진경 옮김, 상상의힘, 2020. 이하 <소년과…>)(이 책은 별도로 쪽수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쪽수 없이 큰따옴표로 인용한 것은 모두 이 책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힌다. 단행본과 달리, 영화는 겹화살괄호(《 》)로 인용했다.)에서 다정한 메시지와 소담한 그림은 서로 행복하게 어우러진다. 노장의 깊이 있는 인생 통찰은 진하고도 쉽게 독자의 마음에 스며든다. 그가 전하는 조언은 별도의 해설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에 부드럽게 와닿는다.

  그러나 만화의 모든 부분이 쉬운 것은 아니다. 작품의 제목처럼 소년의 인생행로에서 두더지와 여우와 말이 각각 순서대로 출현한다. 이 세 동물은 왜 이 순서대로 출현해야 했고, 그들 각자가 지닌 의미는 무엇일까? 이 글에서는 앞의 질문에 답해 가면서 <소년과…>의 전체적 구성과 그 의미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소년과…>는 어린아이와 두더지와 여우와 말이 함께 걷는 여행길을 다룬다. 이 만화를 본격적으로 분석하기에 앞서, 어린아이가 지닌 특수성을 언급하고 싶다. 아이는 ‘내면의 존재’라 일컬을 수 있다. 성장 과정에서 내면의 큰 변화가 일어날 뿐만 아니라, 만인의 내면에 ‘이너 차일드’(inner child)가 깃들어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거의 모든 일은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소년과…>의 이야기를 그 자체의 내적 실재로서 존중하며 한 (어린)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분화와 성장의 비유로도 읽어봄 직하다.

  두더지가 왜 처음으로 나타나는 동물이어야 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두더지의 행동 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두운 지하에서 활동하는 두더지의 특성과 더불어 작중에서 케이크를 향한 식탐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두더지의 기호를 고려하면, 마음의 심연에서 꿈틀대는 어떤 욕망덩어리가 연상된다. 식욕을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로 보는 견해도 중요하게 참고한다면, 한 인간의 인생길에서 두더지가 첫째로 등장한 현상이 납득가는 바가 있다.

  소년과 두더지는 그렇게 만나게 된다. 그 둘은 함께 “거친 들판”을 바라본다. 들판은 인생의 공간 형상이다. 그런 들판이 왜 처음에는 아무 색깔도 없는 흑백 스케치로 그려졌다가 바로 그다음 페이지에서는 알록달록하게 채색된 것일까? 가정을 벗어나 처음으로 집 밖 세상을 목격한 어린아이의 스키마는 어떤 상태일 것인가? 거의 아무것도 기업 되지 않은 상태일 터이다. 그런 아이의 뇌리에 낯선 세상을 대면하게 된 공포가 밀어닥치지 않을까? “우리가 두려움을 조금 덜 느낀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봐.”라고 말하는 두더지의 조언이 담긴 페이지에서 들판의 자연이 온갖 유채색으로 채워지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공포가 희석된 어린 인간의 눈에 세상은 수많은 정보의 만화경으로 비칠 것이요, 마음에 관한 두더지의 언명에 따라 작품 속 세계는 뒤바뀐다.

  이윽고 들판에는 눈 내리는 밤이 온다. 나뭇가지에 앉은 소년과 두더지의 아래에서 여우가 출현한다. 한창 세상이 다채로워지는 그 찰나에 “살아오면서 받은 상처”의 화신인 여우는 왜 등장해야 했고, 애초에 여우는 왜 상처받는 이의 역할을 맡아야 했을까? 첫째 의문에 대한 답은 비교적 수월하게 찾아질 듯하다. 세상을 물들이는 수많은 경험 중에서 상처의 검붉은 핏물을 그 누가 피할쏜가? 둘째 의문에 대한 힌트는, 여우라는 동물이 품은 일반적 이미지를 떠올리면, 구해질 수 있을 듯하다. 여우가 지닌 간교함의 이미지가 상당히 강해서 그런 편견이 여우에 대한 야멸찬 배척을 낳았다고 추측해 볼 만하다.(이 가정에 관련된 흥미로운 참고 사례로서, 바이론 하워드와 리치 무어가 공동으로 감독을 맡은 애니메이션 영화 《주토피아》(미국, 2016)를 언급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여우인 닉 와일드는 유년 시절에 그가 여우라는 이유만으로 또래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입에 입마개가 씌워지는 괴롭힘을 경험한 바 있다. 이 장면은 여우가 간악한 동물이라는 편견이 실제로 있고 그런 편견이 여우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함을 보여주는 실례다.) 눈 내리는 들판에서 지새우는 밤은 그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울 것인가.

  그런 들판에서 “때로는 길을 잃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두더지와 여우는 소년을 “사랑”한다. 그 사랑은 소년을 “집에까지 데려다줄” 강력한 힘이다. 집은 인간 생활의 기본을 담보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저 집을 향해 걷기만 하느라 여념이 없을” 수밖에. 집으로만 향하는 인간의 경향성이 언급된 장면 직후에 마지막 동물인 말이 출현한다. 말은 왜 이 타이밍에 등장해야 했고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말의 언행을 자세히 읽어보면 흥미로운 지점들이 발견된다. 말은 “우리가 알아야 할 게 있다면 그건 지금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그런 말은 날개가 돋아 소년을 등에 태우고 하늘을 난다. 말은 어떤 페이지에서는 백마로, 또 어떤 페이지에서는 흑마로 그려진다. 이 정도까지 나열하고 나면,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드로스>가 선연히 떠오른다. 이 대화편에서는 사랑하는 영혼에는 날개가 돋는다는 아름다운 비유가 구사된다. 그 비유를 통해 사랑은 궁극의 이상적 가치로 고양된다. 집은 그런 가치가 실현되기 위한 최소한의 근간으로서도 의미를 지닌다.

  사랑의 신전으로서의 집을 발판 삼아 날개 달린 말은 비상한다. 그 天馬의 펄럭이는 날개로부터 사랑의 아름다운 율려(律呂)가 울려 퍼진다. 그 사랑은 바로 우리의 동심에 있고, 소년은 그 천마를 제어하는 마부다.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의 이 유기적 우정은 <소년과…>의 느슨한 서사성을 보완해 주는 밸런스를 이룬다. 이 애틋한 균형은 우리네 인생에서 계속 평온한 진실을 유지하려는 희망의 몸짓이기도 할 것이다.

필진이미지

박동성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2023 대한민국 만화평론 공모전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