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인들 사이에서 버티는 것도 재능이라면
고교 탁구팀의 이야기를 담은 <펜홀더> 10화에서 주인공 한이연은 연습은 재능 없는 애들이나 하는 거라 말한다. 그 순간 여전히 탁구부 연습실에서 연습하던 도진의 등급이 C-에서 C+로 변한다. 고교 탁구 리그에서 C- 실력은 겨우 선수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수준이다. 도진은 지역 대회에서 본선도 가지 못하는 선수다. 그럼에도 모래주머니를 달고 매일 아침 뛰어 교문을 통과하고 S- 실력의 해원을 포함한 부원들이 연습을 마치고 돌아갈 때도 남아서 혼자 연습을 계속한다. 여기엔 "노력은 재능 없는 놈들이나 하는 거라지만 노력도 재능이라고…."라 적은 댓글이 약 2천 개의 '좋아요'를 받고 40개의 대댓글을 받으며 베스트 댓글이 됐다. 하루 이틀이 쌓여 한 주가 되고 한 달, 일 년을 노력해서 B-도 아니고 C+가 됐다. 남연고의 문상환은 연습 게임에서 도진을 상대로 점수를 리드하며 연습 더 해야겠다며 훈수를 둔다. 점수가 뒤지는 상황에서도 도진은 커트맨의 장점(커트맨은 스매시나 드라이브보다는 커트보(공의 밑 부분을 쳐서 역회전하는 볼)를 치는 수비형 플레이스타일로 전면의 평면 러버와 후면의 돌출 러버로 만들어지는 커트의 구질과 회전량의 변화로 상대방의 실수를 유도한다. <펜홀더> 13화)을 포기하는 고집스러운 면을 보이며 포(빨간 면)만을 이용해 경기를 진행한다. 또 다른 독자들은 그런 도진을 '재능 없는 근성 왕'이라 칭한다. 그런데 혹자의 말처럼 저것도 재능이지 않을까.
많은 팬은 <펜홀더>를 한국판 <슬램덩크>라고 말한다. 탁구 명문 고등학교 선수들은 연희고와 연습 게임을 하는 것을 시간 낭비라 여길 만큼 대부분 지역 대회 본선 진출이 목표인 선수로 이루어진 고교 팀. 조금은 불량한 태도로 겁 없이 덤비는 주인공 한이연, 작중 최고 실력자라 여겨지는 이수린의 인정을 받는 반해원 그리고 엄청난 노력파 김도진까지 캐릭터들의 설정이 어쩐지 <슬램덩크>의 캐릭터들과 겹쳐 보인다. 독자들은 이 두 작품을 보면서 엄청난 재능을 가진 주인공에게 기대하고 놀라고 대리 성취감을 느끼면서도 깨지고 실패하고 오기를 부리는 인물에 더 깊이 공감하고 애정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탁구 시작 후 몇 개월 만에, 눈에 띄는 성장을 보이는 이연을 두고 주변에서 내리는 평가에 몸이 떨릴 정도로 질투심을 느끼는 도진을 보며 안타까워하고 오히려 도진을 진짜 주인공이라 여기기도 한다.
천재는 거대한 인내일 뿐이다.
이은재 작가는 비약적인 성장을 위해 도진을 궁지로 내몬다. 탁구 명문인 남연고에 캐스팅 제안을 받고 자신의 실력을 빠르게 따라오는 이연에 복잡한 감정을 느낀 도진은 전학을 선택한다. 그리고 전학 당일, 남연고 학생들의 무시와 텃새 속에서 도진은 연습 게임에서 만났던 문상환과 다시 붙게 된다.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순간에도 상대에 예의를 보일 만큼 탁구 경기를 존중했던 도진은 지난 연습 경기와 동일한 전술로 이미 1세트를 내준 상황에서 롱 핌플 아웃인 후면 러버를 떼버리고 경기에서 질 경우 은퇴를 선언한다.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으나 분명한 타개점을 찾지 못한 도진은 서브 실수로 실책하기도 하며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것을 교과서적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해 왔던 지난날들의 노력이 오히려 도진을 가두는 새장이 되었고 홍시영은 그런 도진의 경기를 보며 메트로놈 같다고 비유한다. 당연하게도 도진은 2세트까지 패배한다. 도진의 독불장군 같은 면모를 믿고 응원했던 독자들은 극도의 긴장감을 느꼈으리라. 도진이 고집을 꺾기를 바라는 독자들의 답답한 마음은 도진의 스텝이 꼬이며 우연하고 아주 사소한 사건으로 해소된다. 그 몇 초의 순간 덕에 도진은 새장 문을 밀고 나와 아주 높이 날아오른다. 결국에 자신이 갇혀 있던 벽을 넘은 도진은 3:2로 게임에서 승리한다. 팬들은 더욱 열광했고 반작용처럼 빠르게 스토리에 빨려 들어간다. 그런 도진은 몇 개월 만에 A++ 랭크에 등극하고 남연고의 또 다른 에이스로 자리 잡는다.
각자의 몫을 위하여
노력도 재능이고 그 재능을 타고난 도진이 날마다 군말 없이 해내는 연습량을 보다 보면 자꾸만 이 선수가 내게서 멀어진다.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생각하며 앞만 보고 나아가는 일은 얼마나 괴롭고 끔찍한 일인가. 대부분의 사람은 연희고의 또 다른 선수인 세인과 경태에 더 가까울 터다. 도진과 이연의 등을 바라보며 죽도록 노력하니 따라갈 수 없는 상대,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으니 당연히 짧은 연습 기간만으로도 나를 앞지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연습 시간을 겨우 채워내는 세인. 경기 시작도 전부터 상대에게 질 것이라 예상하고 경기 중에도 무리라 생각하고 금방 포기해 버리는 경태. 실력도 없는데 승부욕까지 강한 건 추한 거라는 생각에서 비롯해 속없이 웃어 보이는 경태를 보며 전직 올림픽 메달리스트는 왕경태에 진다는 건 화나는 일이라며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말을 전한다. 지역 대회 예선에서 상대 선수에 모욕적인 말로 무시를 당하던 둘은 각각 B와 B+로 랭크를 올리며 예선을 통과한다. 세인은 자신의 몫을 찾고자 탁구를 포기하지 않는 서사를 가진 인물로, 경태는 누구보다 탁구를 존중하는 주장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임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 두 인물을 보다 보면 작가는 독자에게 꼭 엄청난 실력을 갖추지 않더라도, 단지 좋아한다는 마음만으로도 자신의 위치에서 자기의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이은재 작가는 재능 파 이연과 노력파 도진을 교차해 그려내며 세인과 경태를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타고난 운동 신경도 없고 죽을 만큼 노력할 재능도 없지만 결국에 세인과 경태는 탁구를 계속할 것이다. 어쩌면 이 둘은 프로 선수로 가는 길에 도착할 수 없고 그 순간에 다시 한번 멋쩍게 웃으며 역시' 프로는 쉽지 않네'하고 다른 삶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겠지만, 그런 이들에게 어느 독자가 '시간 낭비, 인력 낭비'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모두가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달려가는 이 순간에 여전히 그 트랙에 서 있다면 언제든지 결승선을 밟을 수 있다. 순위는 중요하지 않다. 결국에 시작한 경기를 끝냈다는 게 중요할 뿐이다. 아주 평범한 사람에겐 모두 다 나보다 잘난 것 같은 세상에서 내 몫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재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