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대에도 여전한 ‘산재 공화국’ 한국 : 김성희·김수박 <문 밖의 사람들>
2022년 5월, UN 통계국은 한국에 대한 분류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변경하였다. 이미 그 전부터 한국은 여러 경제 지표에 걸쳐 개발도상국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UN의 결정은 한국이 명실상부하게 경제적으로 적지 않은 힘을 지닌 나라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한국은 오랜 시간 그렇게 꿈꾸던 ‘선진국’에 공식적으로 진입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이러한 국위 상승을 체감하고 있을까. 분명 경제적인 지표의 차원에서는 다른 나라들이 부럽지 않을 수준으로 자본을 모으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삶의 질’이라는 차원에서는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특히 노동의 차원에서는 참으로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다. 여전히 한국은 2022년 기준 OECD 연평균 노동시간인 1,719시간보다 훨씬 긴 1,904시간 동안 일을 하면서도, 임금체불액은 일본의 약 100배에 달한다. 2014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국제노총(ITUC)의 ‘세계 노동권 지수’(Global Rights Index)에서 한국이 올해까지 무려 11년 연속으로 최하위인 5등급을 받은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기본적인 노동 환경이 여전히 불안정하고 제대로 된 권리를 보장받기 어려운 마당에, 일하는 노동자들의 안전이 제대로 지켜지기 쉽지 않다. 2023년 한국에서 산업재해(산재)로 인해 발생한 사고 사망자 수는 총 812명이다. 하루 약 2명이 일터에서 목숨을 잃고 있는 셈이다. 산재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이 정도인데 산재로 몸을 다치는 사람은 얼마나 더 많을까. 제대로 산재로 접수가 되지 않거나 못한 이들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일터에서 몸을 상하는 사람은 훨씬 많을 것이다. 국가는 선진국이 되었지만, 정작 그 나라에서 일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결코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 자신의 몸을 노출시키는 ‘목숨을 건 생존 게임’을 하고 있는 셈이다.
각자의 길을 가던 두 청년, ‘산재 피해자’와 ‘노동안전 활동가’로 만나다.
△ <문 밖의 사람들>의 전반부에서 박행의 이야기는 붉은 톤으로, 이진희의 이야기는 노란 톤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색의 차이는 둘의 행로가 쉽게 마주치지 않을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연출이기도 하다.
지난 2020년에 출간된 김성희·김수박이 공동으로 집필한 만화 <문 밖의 사람들>(도서출판 보리)는 이 처절한 생존의 현장을 지긋이 드려보는 르포 장르의 작품이다. 본래 독립만화를 그리는 작가들이 십시일반 협동하여 만든 무크지 <Sal>(살북)에서 함께 참여했던 두 작가는 2010년대 한국 르포만화의 효시가 된 <내가 살던 용산>(2010, 도서출판 보리)을 시작으로 때로는 같이, 때로는 각자의 시선과 리듬으로 한국 사회에서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사건과 흐름을 만화로 짚어내는 작업을 꾸준하게 이어나가고 있다.
만화의 두 주인공인 ‘박행’과 ‘이진희’는 사건이 벌어졌더라면 아마 서로를 만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작중 진희의 말처럼 둘은 어디선가 스쳐 지나가듯이 봤을 수는 있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대화하는 일은 쉽게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두 주인공이 각자 마음먹은 바가 다르기에 작품은 초반에는 둘의 이야기를 서로 다른 색으로 교차하며 표현한다. 박행의 이야기는 붉은 계열의 색으로, 진희의 이야기는 노란 느낌의 색으로. 하지만 두 명의 주인공에게는 모두 저마다의 꿈을 키우며 조금씩 앞으로 전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전에는 민주노총 법률원의 사무직원으로 일했던 박행은 직장을 그만둔 뒤 열심히 공부한 끝에 노무사가 되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집회에서 사회운동단체 ‘노동건강연대’를 알게 되어 그곳의 활동가로 일을 하기 시작한다. 한편 진희는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인해 일찌감치 꿈을 포기하고 나중에 적당히 공무원이 되기 위해 대학도 적당하게 들어갔지만, 고민 끝에 사회복지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서로 만날 일이 없었을 둘은 한국 사회가 만들어 낸 구조로 인해 비로소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다. 한 명은 ‘산재 피해자’로, 다른 한 명은 산재 문제 해결을 위해 분투하는 ‘노동안전 활동가’로 말이다. 진희는 사회복지사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지만, 공부를 위해 필요한 돈을 모으기 위해 휴대폰 하청 제조 공장에서 일한 지 나흘 만에 쓰러지고 말았다. 일을 한지 일주일도 안 되어 진희의 뇌는 심각하게 손상되어 거동도 쉽지 않았고, 무엇보다 시신경이 큰 피해를 입어 영구 실명 판정까지 받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진희가 일하던 공장은 바로 얼마 전에 진희가 입은 피해와 동종의 산재 사건이 연달아 벌어져 박행이 분주하게 나서던 곳이었다. 빠르게 문제를 해결했다는 공장의 설명과 달리 실제로 공장에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또 다른 피해자가 탄생하고 말았다.
꿈을 꾸는 노동자에게 한국 사회는 '산재'를 선사했다.
△ 서로 다른 색으로 전개되던 박행과 진희의 이야기는 ‘산재’를 계기로 같은 하나의 녹색 톤으로서 그려지게 된다.
서로 다른 색으로 그려지던 박행과 진희의 이야기는 산재 피해로 인해 서로를 인식하게 되며 같은 녹색 톤의 색이 입혀진다. 이와 함께 이야기의 톤도 조금 달라진다. 전반부까지는 둘이 서로를 알게 되기 전까지 어떻게 각자의 길을 걸어갔는지를 그렸다면, 후반부에서는 산재 피해로 서로를 알게 된 이후 어떤 식으로 함께 움직이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이야기의 집중점이 달라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산재 피해자이든, 활동가이든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한 명의 ‘인간’으로 담아내는 선택이다. 만화는 산재 피해자를 그저 가엽게 여겨야 할 불쌍할 존재로, 활동가는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불굴의 전사로서 그리는 대신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존재’로서 그려낸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만화가 담아내는 메시지를 더욱 깊게 만드는 것에 기여한다. 소박한 꿈을 지닌 한 명의 노동자는 왜 심각한 산재 피해에 노출되고 말았는가. 당장이라도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는 왜 오랜 시간 계속 방치된 채, 적은 수의 활동가의 노력을 통해 겨우 세상에 알려지고 있는가. 작품이 강조한 두 주인공의 평범성은 그렇게 위험이 하나의 평범한 일상이 되고만 한국 사회의 단면을 고스란히 비춰내고 있다.
<문 밖의 사람들>이 발표되고 약 4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는 다시 한번 스스로 위험이 일상이 되었음을 입증하고 말았다. 지난 6월 24일, 경기도 화성시의 일차 전지 제조사 ‘아리셀’에서 배터리가 연쇄적으로 폭발하며 화재가 발생해 총 2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공교롭게도 <문 밖의 사람들>이 다룬 2015~2016년 연달아 발생한 휴대전화 부품공장에 불법으로 파견된 노동자들의 메탄올 중독 사건처럼, 이 사건 역시 대기업의 하청 공장에 불법으로 파견된 노동자들이 안타깝게 피해를 입고 말았다. 피해자 중에서 재중동포가 있었다는 점까지도 동일하다. 아리셀에서 세상을 떠난 노동자들 역시 진희처럼 저마다의 꿈을, 거창하지 않아도 소박한 꿈을 꾸면서 이를 이루기 위해 그곳에서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그 꿈에 산재로 보답하였다. 여전히 쉽게 바뀌지 않는 ‘산재 공화국’ 한국에서 매일 어디선가 발생할 하나의 초상으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