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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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버지의 복수만 끝이 없는가

아버지의 복수는 끝이 없어라(글, 그림 : 강태진/카카오웹툰 연재)

2024-08-21 김선준

왜 아버지의 복수만 끝이 없는가

아버지의 ‘복수는’ 끝이 없어라

  ‘복수’에는 언제나 복수심을 형성한 원인과 복수의 성패라는 결과가 따라다닌다. 모든 복수물은 이 원인과 결과가 각각 어떠하냐에 따라 서사 전개 방식이나 주제 의식 등을 분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근 몇 년간 드라마와 웹툰에서 쏟아져 나오는 복수물들은 ‘안타고니스트의 절대적인 악행’을 복수의 동인으로 삼으며, ‘프로타고니스트의 절대적인 복수 성공’을 복수의 결과로 내세운다. 이렇게 서사의 시작과 끝이 설정되고 나면 캐릭터와 플롯, 작품의 주제 의식은 납작해질 수밖에 없다. 반대급부로 독자/시청자가 느끼는 통쾌함만이 그 부피를 키울 뿐이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의 복수는 끝이 없어라>(이하 <아버지의 복수>)는 최근 복수물의 흐름을 역행하는 작품이다. 복수물로 제한하지 않더라도 가장 독특한 지점은 서사를 끌고 나갈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가 명확히 설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며, 이들의 선악이 모호한 데다, 여러 시점과 시간대를 오가다 보니 플롯이 복잡해지고 진실을 특정하기 어려워진다. 복수물의 사이다 전개를 통한 통쾌함을 느끼고 싶은 독자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복수>는 어떠한 쾌감도 허락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복수는 ‘끝이 없어라’

  사실 캐릭터와 플롯이 복잡하더라도 그 중심에 있는 복수가 단순하다면 독자들은 쉽게 이입하여 원하는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023년을 뜨겁게 달군 <더 글로리>가 적절한 예시다. 16부작이라는 적지 않은 길이에 많은 등장인물과 그들의 시점, 18년이라는 긴 터울의 시간을 오가는 이야기지만, 결국 그 줄기는 ‘문동은의 처절한 복수 실행’이다. 그 많은 등장인물들은 결국 문동은의 조력자이거나, 대립자다.

  반면 <아버지의 복수>를 전진시키는 복수는 여러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다. 씨줄이 부부나 형제, 친구 관계라면 날줄은 부모 자식 관계 혹은 계층적 상하 관계로 나타난다. 한 올 한 올만 봤을 땐 평범한 사람, 평범한 관계지만, 이들을 드라마틱하게 직조하는 힘은 복수이다. 복수가 끝없이 연쇄되며 모든 인물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 거듭난다.

  이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복수의 연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29화에 등장하는 에피소드이다. 도훈이 어린 시절 중국집 배달일을 할 때 배달한 그릇을 회수해 오지 못하자 사장은 도훈의 친구 정식이와 비교하며 그를 나무란다. 이에 대해 정식이 도훈에게 충하길, 우리 그릇이 없을 때 다른 중국집 그릇을 아무거나 집어 면 된다며 이렇게 말한다. “멍충아. 거긴 거기대로 우리 꺼 쓰고 있는 거지. 다른 집도 갯수만 맞추는 거라고. 중국집 그릇은 그렇게 돌고 도는 거거덩. 그렇게만 하면 사장님도 아무 말 안한다구.”

  복수 또한 그렇다. 첫 번째 죄가 발생했을 때 거기에 공적 집행이 이뤄지지 않는 이상 그 죄의 해소는 사적 복수를 통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적 복수는 또 다른 죄를 일으킨다. 자신이나 가까운 사람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 ‘용서’ 혹은 ‘참회’가 끼어들지 않는 한 사람들은 그 자리를 다른 죄로 채워간다. 문제는 이 연쇄를 끊을 피해자의 용서와 가해자의 참회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사이다 복수극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 또한 근간의 사람들에게 용서나 참회를 할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트레스와 분노, 혐오에 이미 충분히 노출된 사람들에겐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가장 손쉽고, 명징하고, 통쾌한 선택지다.

  극중에서 참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30년만에 나타난 영춘은 ‘정신승리’를 주창하며 과거를 무화시키는 방식으로 제3의 선택지로 살아가지만, 일련의 사건을 겪은 후 덕수에게 진심 어린 참회와 사과를 하게 된다. 하지만 영춘의 말로에서 볼 수 있듯 눈물과 애통한 말투로 장식된 추상적 사과는 오늘날엔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반면 도훈을 복수 대상으로 오해해 도훈의 사업을 망하게 한 범수(짱구)의 사과는 효과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돈과 부동산이라는 가시적인 보상이 함께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복수는 끝이 없어라

  제목에서 가장 의미가 모호한 부분은 ‘아버지의’이다. ‘아버지’는 누구고, 누구의 아버지인가? 또, ‘아버지의’라는 것은 ‘아버지에 의한’의 의미인가, ‘아버지를 위한’의 의미인가? ‘아버지에 의한 복수’라면, 복수의 주체인 ‘아버지’는 덕수, 영춘, 도훈, 희도 중 누구로도 해석 가능하다(덕수에겐 실제로 자식이 없지만 도훈에게 있어 ‘가짜 아버지’의 역할을 한다). 한편 ‘아버지를 위한 복수’라면 덕수와 범수 중 한 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인물을 복수의 주체로 설정하든 각각에서 복수의 의미와 주제 의식이 달라지기 때문에 흥미로운 지점이다. 결국 ‘아버지의 복수’라는 어구만으로 세대 간에 이어지는 복수의 연쇄를 우리는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왜 아버지의 복수’만’ 끝이 없는가 하는 점이다. 극중에서 복수의 시발점, 즉 범죄의 피해 대상과 가해자에는 아버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귀녀는 봉준호의 <마더>를 떠올리게 하는데, 아들 도훈을 끔찍이 생각해서 도훈이 무고하게 감옥살이를 하게 되자 혐의를 풀기 위해 애쓰기도 하고, 도훈을 위해 덕수를 30년 동안 가두고 덕자까지 죽인 장본인이다. 그녀는 복수의 간접적 피해자이면서 직접적 가해자다. 달리 말하면 정귀녀는 아버지’들’의 끝없는 복수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여성이자 어머니다.

  반면 또 다른 어머니 송명자는 정귀녀와 마찬가지로 복수극의 중심에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정귀녀와 달리 복수와 가장 멀리 있는 인물이다. 그녀에게는 오직 피해자의 위치만이 주어진다. 아버지의 학대와 매매혼부터, 남편의 학대와 시어머니의 정죄,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만난 덕수와 희도의 구타 및 피살까지. ‘아버지들’이 서로 죽이네, 어쩌네 복수의 칼을 갈고 실행에 옮기는 동안 명자는 모든 복수들의 희생양으로 남을 뿐이었다. 중후반부에 복수를 매듭짓기 위해 ‘아버지들’ 사이에서 참회와 사과가 오가는 동안 명자에게 사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들’의 복수는 계속해서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지기에 끝이 없다면, ‘어머니’의 복수는 시작조차 없기에 끝도 없다.

  런 명자와 비슷한 처지를 굳이 찾자면 강아지 코코가 있다. 코코 또한 복수의 연쇄에서 명자처럼 아무 힘 없이 희생당한 존재다. “지금은 뭐… 예전이랑 똑같아요. 그냥 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코코가 없어진 것만 빼고요. 코코한테 그러지 말어야 하는 건데… 코코는 아무것도 몰랐잖아요.”라는 희지의 대사에서 보듯, 명자와 코코는 죽임당할 이유 없이 죽었고, 그들의 죽음은 아무런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어쩌면 이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복수의 연쇄를 끊어낸다고 할 수 있다. 무기력하게 침묵하는 희생. 그런 희생양들을 통해 남은 인물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마지막화에서 교도소 생활을 하던 덕수는 끝없이 이어지는 복수의 굴레, ‘지옥’이라 표현되는 복수심의 연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거는 마 어쩔 수가 없는 일이라. 그중 한 놈이 그 지옥을 지가 끌어안고 살겠다꼬 마음 묵을 때까지.” 마지막 시점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원하던 대로 복수에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다. 명자 같은 인물이 지옥을 끌어안고 살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혹시 자신은 복수의 연쇄 속에 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누군가 당신에게 갈 지옥을 감내하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누군가를 기억하고, 충분히 미안해하는 것이다.

필진이미지

김선준

만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