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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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사랑

현혹(글, 그림 : 홍작가, 네이버 웹툰)

2024-09-04 신경진

불멸의 사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대문호 톨스토이는 자문한다. “사람은 사랑없이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인류에게 사랑하는 감정이 없다면 현대적 의미의 전체론적인 입장에서 우리의 삶은 가치를 잃고 극단적인 이기심으로 고독한 세계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고독한 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인간은 단수가 아니기에, 혼자만의 시간은 어디까지나 한시적 욕구에 지나지 않기에 나 혼자 산다라는 명제는 필멸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이들의 삶의 문장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세계에서 홀로서기가 가능한 존재가 있다면 이라 불리는 존재이거나, 필시 불멸에 가까운 능력을 보유한 다른 차원의 인류일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웹툰 <현혹>불멸에 관한 존재론적 고독의 이야기다. 불멸한다는 것은 고통마저 없는 고통, ‘무위고의 삶을 애오라지 견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존재론적 고독은 다른 개인들이나 세계로부터의 근본적인 고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불사의 몸을 가진 송정화 여사는 초상화를 이용해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공식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세상과의 단절을 이뤄 고독한 존재론적 죽음을 달성하려 하는 존재다. 이러한 소멸 방식은 표면적으론 사람들과 완전히 교류가 없는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고독사와 유사하게 보일 수 있으나, 그녀의 주위엔 인간들이 북적거린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고용된 윤이호, 저택을 관리하는 철순이 내외, 뱀파이어 사냥꾼 바야르마, 천진린, 샤오룬, K , 이처럼 송정화가 흡혈귀인 줄 알면서도 그녀의 주변엔 늘 인간들이 득실거린다. 그것도 하나같이 저마다의 사연인연으로 묶인 채.

  굴비 엮듯 엮여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의 중심 배경에는 형용하기 어려운 마력을 지닌 흡혈귀 송정화가 항상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살아있는 것을 매혹하는 능력이 있어 인간의 피를 원치 않는 그녀는 저택 밖으로의 외출을 최대한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사람의 탐욕은 끝이 없는 것인지, 그런 그녀에게 그들은 불나방처럼 달려든다. 그 와중에 송정화 역시 제 나름대로 죽음을 완성하고 저주받은 핏줄의 인연을 끊기 위해 환쟁이윤 화백을 고용하게 되고, 윤 화백은 저택의 불길함 속에 현혹되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느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시간을 벌어보려 그녀에게 자신이 살아온 인생 전부를 들려줄 것을 제안하게 되는데, 그녀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현혹>의 핵심 부분인 뱀파이어와의 인터뷰가 그려진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공허함과 추위를 무심히 이겨낸 윤 화백의 용기는 인간이기 전에 예술가이기에 가능한 순정이었을까. 인터뷰를 통해 드러난 그녀의 순수한 목적을 알게 된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연극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녀를 뒤로한 채 방백으로 고백해버린다. “늘 세상 가장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라고. 그렇게 둘의 사랑은 가을밤처럼 깊어져 간다.

  사실 송정화는 윤 화백을 처음 봤을 때 떠올린 사람이 있다. 그녀의 첫사랑 천진린. 그는 한마을에서 핍박받는 아이(흡혈귀)를 구해주었다가 나중에 그 아이가 마을의 모든 사람들을 말살하는 하는 것을 보고 죄책감으로 뱀파이어 사냥꾼이 되는 진짜남자이자 그녀를 사살하라는 교단의 명령마저 어기고 송정화를 위한 끝사랑을 선택하는 로맨스 가이다.

  천진린은 사랑했다. 진정 그녀를. 송정화 또한 그런 그의 사랑을 잘 알기에, 그가 죽었을 때 허망한 짓인 줄 알면서도 미련한 애착으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마는데. 사랑해서 저지른 실수<현혹>의 모티브이자 탄생 배경인 것이다.

그리고 작품은 말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그저 있는 그대로온전히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사랑하기 위해 과거의 사랑과 닮은 사람을 찾는 짓은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을. 송정화가 윤 화백과의 첫 만남부터 진린을 떠올린 것은 사실이나, 윤 화백이 진린을 닮아서 사랑한 것은 아니다. <현혹>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윤 화백이 그린 그림을 향해 송정화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장면이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가에 눈물을 머금은 채 기억을 걷는그녀의 미소를 볼 수 있다. 그 소리 없는 미소의 의미는 아마도 윤이호를 향한 사랑이겠지. 어둠보다 깊고 혈관보다 투명한 사랑.

  사랑을 잃고 인간의 오감도 잃어가는 그녀에게 이승에서의 삶은 너무나 무가치했기에, 조각같이 나뉜 이야기의 퍼즐이 완성되었을 때 초상화를 토대로 달성하려 했던 존재론적인 고독한 죽음의 방식은 진심이었음이 밝혀지지만, ‘누군가가 마음에 걸렸을까,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모두를 위한 삶의 방편을 찾았는지, 홀로 고독하게 불멸의 생을 이어갈 것임을 암시하며 웹툰 <현혹>의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특별한 이유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도 마찬가지. 그래서 사랑엔 이유가 없다, ‘사랑의 모양만이 있을 뿐. 철순이 아내의 기다림에도, 쓸쓸한 방명록을 남긴 그녀의 흔적에도.

  윤 화백은 그가 가진 재주, 그림을 통해 그녀와의 사랑을 꿈꿀 것이다, 영원히. 송정화는 기억이란 사랑의 모양으로 어디선가 또다시 불멸의 사랑을 그려 나가겠지. 그것도 영원히. 우리 또한 단수가 아니기에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이다.

PS : 노파심으로 말하건대, 영원히 그리워할 자신이 없다면, 행여나 그녀를 만나더라도 절대, 현혹되지 마시길.

필진이미지

신경진

만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