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주택자는 왜 시체를 유기했을까
청약통장 월납입 인정한도가 오른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랜 기간 적은 액수를 저축해오던 이가 더 많은 액수를 저축하는 후발주자에게 추월될 수도 있다나. 없는 사람들이 제 집 구하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사람들의 반응에 동의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이렇다 할 감정적 타격을 입지 않았다. 이미 번듯한 자가를 가지고 있어서? 당연히 그럴 리는 없다.
돌이켜보면 한 번도 내 집 마련의 꿈을 꿔본 적이 없다. 수 년째 청약통장에 저축을 하고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서울에 내 집 마련이라니, 농담이 아니라 일론 머스크가 이끈다는 우주선의 탑승권을 구매하는 일과 다르지 않게 들린다. 수백 억이나 수십 억이나 어차피 도달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금액이라, 이 세상의 누군가는 정말로 탑승하겠으나 내게는 별나라의 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청약을 든 것은 일종의 미신에 가깝다. 남들이 하는 최소한의 일조차 하지 않으면 부정이 탈 것 같다는 바보 같은 이유로 저축 중이다.)
부동산 문제에 관해 내가 느끼는 묘한 무기력감과 열패감이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진심 섞인 이야기를 우스꽝스러운 농담이라도 되는 듯 희석해 꺼냈지만, 거주 문제는 일상을 지배하기 때문에 사실은 훨씬 더 직접적인 우울과 공포로 다가온다. 원룸에 슨 곰팡이를 없는 셈 치고, 잦은 이사에 작은 장식품 두는 것조차 주저하고, 다음 보증금을 해결할 방법이 없어 고심하거나 사기당하진 않을까 불안에 떨어야 하는 매일, 매 계절, 매해를 견디다보면 차라리 사라지고 싶다는 데 생각이 이르는 것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다.
유기 작가의 웹툰 <부동산이 없는 자에게 치명적인>(네이버웹툰)이 하필 스릴러의 옷을 입고 나와 소재와 장르 자체만으로 눈길을 끈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다. 이 작품은 앞서 상술한 ‘부동산이 없는 자’라면 피할 수 없는 고충들에 이골이 난 20대 여성 ‘방지애’의 이야기다. 무주택자 청년(앞으로도 구매 가능성 없음)이 겪는 공포와 압박을 스릴러 특유의 생과 사를 오가는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통해 절묘하게 그려냈다. 다만 이 작품의 주인공 방지애는 나보다 훨씬 더 생존 의지가 강했던 것인지, 자신이 사라지기보다는 타인을 없애 살아남는 쪽을 택한다.
방지애는 고교 동창 ‘부예지’(유주택자)의 도움으로 전세금을 모을 때까지 그의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으나, 어느 날 갑자기 부예지가 집 안에서 실족사하고 만다. 퇴근 후 죽은 부예지를 발견한 방지애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친구를 잃은 슬픔도, 앞으로의 장례 절차도 아닌 이 집에서 쫓겨나 다시 고시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옥살이와도 같던 고시원에서의 일상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을 서울 집값의 계산서. 때마침 갑작스럽게 애인이 찾아오고, 이성을 잃은 방지애는 부예지의 시신을 김치냉장고 안에 숨기며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만다. 만화는 부예지가 죽으며 주인 없어진 서울의 아파트를 차지하기 위해 방지애가 벌이는 범죄의 연쇄를 그렸다.
부예지의 죽음과 시체 유기까지, 단 2화만에 일어난 파격적인 사건에 독자들은 흥미를 보이는 한편 입을 모아 방지애를 비난했다. 월세 하나 받지 않고 자기 집에 살게 해준 은혜도 모르고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방지애의 범죄를 통해 사고가 사건이 되기 이전부터 독자들의 여론은 나빴다. 사실 방지애는 전부터 부예지를 향해 일상적인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왔다. 부예지가 내어준 방과 빌려준 중고차는 고시원에 살고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을 해야 했던 방지애의 삶을 분명 더 윤택하게 했다. 하지만 부예지가 쥐고 태어나 당연히 누리는 것들을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다는 근본적인 처지의 차이가 어쩔 수 없이 스트레스를 주었던 것이다.
그야 시체 유기는 신세를 진 친한 친구뿐 아니라 누구에게든 해서는 안 될 짓이다. 그러나 대다수 독자들의 반응과 달리 나는 방지애가 보여준 일상적 박탈감 정도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감정이라 생각했다. 그가 느낀 불만은 ‘이 좋은 걸 너만 누린다’는 생각 이전에 ‘이 고통을 너는 몰라도 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됐을 것이라 추측했다. 나는 그런 종류의 불만이 피로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물리적으로 좋은 컨디션이었다면 밀려오지 않았을 것이나 나쁜 컨디션이기에 막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이라면 쉽게 자유로울 수 없는 감정이기에 함부로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죽은 부예지를 발견한 직후 방지애가 자신의 처지를 헤아리는 장면은 최소한의 감정적인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방지애의 너무도 조그마한 월급 다발과 스크롤을 내려도 내려도 끝이 나지 않은 서울의 집값을 치환한 돈다발을 대조하는 장면은 무주택자가 느끼는 아득한 공포와 막막함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그 현실을 고려한다면, 그래선 안 된다고는 말할 수 있을지언정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는 쉽게 따질 수 없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현재 웹툰의 전개가 다소 극단적으로 치닫는 것이 아쉽다. 가장 아쉬운 부분은 주동인물인 방지애가 독자들의 공감대를 한참 벗어났다는 점이다. 그사이 방지애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여러 명의 사람들을 살해했으며, 벌어들인 돈으로 사치를 일삼고, 범죄가 발각될까 불안해하는 모습은 보여도 죄책감을 느끼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야기의 출발에서 방지애가 보여준 무주택자로서의 보편적인 불안이 무색하게, 문제를 일으키고 대응해나가는 모습은 전형적인 사이코패스 범죄자를 연상시킨다. 사건에 얽혀 있는 다른 무주택자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방지애와는 다른 각자의 사정으로 부동산이 절실한 모습을 보여준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들 역시 동기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극단적인 선택들을 보여준다.
나는 방지애나 그 주변 인물들이 좀 더 윤리적인 갈등 속에서 사건을 전개시키길 기대했다. 부동산이 없는 자에게 치명적인 현실의 공포가 어째서 범법으로 대응될 수밖에 없었는지 좀 더 설득력 있게 그려지길 바랐다. 충분히 볕이 드는 방에는 곰팡이가 슬지 않고, 넉넉히 휴식을 취한 자에게는 피로가 없듯이, 어떤 비윤리적인 선택들 또한 그러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무주택자들의 나약한 변명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